[7권] Part 02 - Chapter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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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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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새벽종이 울리면

Chapter 11. 빛과 어둠(1)

 

-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12:46) -

 

주님의 생애는 크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적인 생애와 공적인 생애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주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까지의 30년의 생애이고, 후자는 하늘의 도를 전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의 3년 동안의 생애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준비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30년 동안은 목수의 아들로서의 사생활을 하시고, 3년 동안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후의 생활에서 영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것은 빛과 어둠의 존재였습니다.

 

즉 주님은 본래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30년의 사생활은 어둠으로 가려지고, 3년의 공생활은 빛으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숨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당시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고,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장성한 후에는 목수 일을하면서생계를유지해왔습니다.그는선지자 이사야의 말대로,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평범한 시골 목수로 조금도 색다른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외모로나 인격적으로 비범한 존재로 대뜸 눈에 띄어 누구나 우러러 보고 존경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주님은 대속의 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30세까지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움직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놀러가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고, 물론 목수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를 자기네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하였으며, 마귀도 방치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30년 동안의 사적인 생애는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에는 인간의 행적밖에 없습니다.

 

빛과 빛 또는 어둠과 어둠끼리는 부딪치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이 확실히 구분될 때 비로소 알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앞선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 역사가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빛이 꺼져 버리고 이곳에서는 빛을 발하니 갈등이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따로 시작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메시아의 직분을 다하도록 지시가 내리자, 주님은 육신의 어머니를 위시하여 여러 동생들과 작별하고 세례 요한에게로 갔습니다. 한 가장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당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주님은 정해진 메시아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은 성경에 미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성경이 그 행동반경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만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성경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마음대로 할 테다.” 하고 딴 길을 간다면 그것은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생활의 첫발을 내어 디뎠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여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빛과 지상의 빛이 연결되어 그 줄기를 통해 하늘과 땅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귀는 빛이 자기 세계를 침범한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입니다. 하늘에서는 빛에 대한 어둠의 공세에 대비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합니다. 주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것은 마귀와의 첫 대결이었습니다.

 

공생활에 접어든 주님은 빛, 곧 성령의 인도를 받아 움직이게 됩니다. 즉 빛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빛을 불담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육을 입고 땅에서 하늘의 큰일을 담당하고 계시니 하나님께서 불담으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말씀으로 물리친 사실이 주님의 간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금식하시는 동안에 주님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지금까지 그 깊은 내막을 드러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 대해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즉 앞으로 하늘의 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여 하나님 우편에 오르기까지 마귀에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자상한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내산에 올라가 40주야를 금식하면서 계명을 비롯하여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고 목적지에 나가도록 여러 가지 지시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43:2 이하 참조)

 

하나님의 아들도 육을 입고 땅에 거하는 이상 이런 하나님의 지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내용을 측근인 제자들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마귀에게 전달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께서 40일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지 못했더라면 마귀를 물리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모욕을 당하며, 채찍에 얻어맞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서 조롱을 받게 된다는 것까지도 미리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고비마다 능히 감당해 내었던 것입니다.

 

약자가 강자에게 당하기보다 강자가 약자에게 당하는 것은 몇 배 괴로운 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처형한 것이 십자가의 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를 위해 하나님께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23:34) 실로 주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최대의 사랑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다 하고 나서 주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해친 사람을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삼는 것은 결코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가 개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빈틈없는 배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에 내노라고 세도를 부리는 자들을 탓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6:9-10, 13:14-15)

 

왜 하나님은 이들로 하여금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였을까요? 만일 교권을 잡은 이들의 눈과 귀가 열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원대한 뜻이 좌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얼마 전에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친 것도 깊이 상고해보면 하나님의 각본에서 움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구동성으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면 사태가 뒤바뀌어 당시의 권력층이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을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아주 버린 것이 아니며, 주께서 승천하신 후 불과 같은 성령을 받아 목숨을 내걸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기독교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주님은 땅에 계실 때 이것을 내다보시고 이들에게 축복 기도를 하였으며,(17:1-26)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왕의 반열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19:28) 천국의 기초석으로 삼을 것을 사도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21:14)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을 본 성도는 500여 명이나 되지만,(고전15:6)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1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불과 같은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런 소중한 성령을 부어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고도 고맙게 여길 뿐, 겁에 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가치는 매장되어, 차라리 주지 않은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일정한 시험을 거쳐서 틀림없다고 인정되었을 때 성령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앞선 역사에서 초창기에 아무나 물 붓듯 성령을 부어 준 것은 감람나무의 역사를 세상에 널리 증거하기 위해서였으며, 알곡을 거두는 나중 역사에서는 그 양상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같은 은혜안에서도 연단 없이 10년 따르는 사람은 연단 중에 1년을 따르는 사람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보물이 담겨도 깨어지지 않는 그릇 말입니다. 이런 그릇이 마련되면 성령을 담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금방 깨어 질 그릇에는 성령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이 그릇을 만드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