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Part 04 - Chapter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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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10
[5권] Part 04 - Chapter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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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4. 예루살렘의 별    

Chapter 27.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종들을 내세워 역사하십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아브라함을 종으로 택하신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들이 활약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 형편에 따라 종을 교체하여 한동안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하나님의 역사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이 줄곧 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말썽이 생길까요? 이런 부작용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생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이 자기를 내세울 때 한동안 알력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으나, 이것은 조만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며, 또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성경에서 심심찮게 구경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를 베드로와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으나 오늘은 좀 더 그 내막을 깊이 캐보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기는 하지만, 그 인간됨이 주님의 수제자 감으로서 별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주님의 부름을 받아 가까이 따르게 되었으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주님이 구세주로 모시기에는 너무나 행색이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막기도 하고, 주를 따르는 대가가 무엇이냐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자고로 쓸 만한 그릇들에게는 그런 계산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영도력이 있고 성격이 괄괄하며 매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한편 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도 강하여 주님을 해치려는 자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리고, 변화산상에서 주님과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초막을 지어 모실 것을 제의했으며,(17:3) 주님이 붙잡혀 끌려가자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쳤으나 대제사장의 집까지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또 솔직 담백한 성격의 소유자라, 이 제사장의 집 뜰에서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바울이 옳다고 생각되자 그를 인정하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베드로이므로 주님도 그를 수제자로 삼고 여러 모로 아껴 주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과는 처지가 다릅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에게 그만큼 헌신했기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되었으나, 사도 요한에게는 주께서 그런 대가 없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일 먼저 안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름까지 베드로(반석)라고 고치게 하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어, 그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하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했던 것입니다.(16:19)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반석(베드로) 같기는커녕 모래 위의 원두막처럼 흔들릴 때, 주님은 그를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에게 나타나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었을 때에도, 주님은 그를 시몬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21:15)

 

그러나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로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구변도 좋아 하루에 3,000명이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여, 명실 공히 수제자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실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대 부흥사로서 맹활약을 했던 것입니다.

 

이 무렵에 베드로 앞에 나타난 것이 바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측근들로부터 바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장본인이 하루아침에 180도로 돌변하여 예수를 증거하고 돌아다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딘가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여겨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베드로도 바울에 대해 차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대충 알아보았더니 아주 엉터리였습니다.

 

베드로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알고 지키는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의 폐지를 주장했으니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지 말라고 엄중히 단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니 바울을 지지하는 무리가 상당히 늘어나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지극히 큰 사도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노라.”(고후11:5)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극히 큰 사도란 물론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비로소 바울이 자기의 만만치 않은 적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울대로 여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즉 쓴 뿌리를 잘라 버리고, 자기 추종자들에게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1:9)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에서 우리는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하나님의 종들끼리 한동안 치열한 암투(暗鬪)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서 담판을 하려고 했으나, 베드로는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1:19) 아직 바울의 기반이 온전히 닦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바울을 따르는 무리는 눈사람을 굴리듯이 늘어났으며, 그 중에는 베드로를 따르던 자들도 상당히 많이 끼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안찰을 하여 성령을 부어주고, 병자를 고치는 등, 권능도 베드로 못지 않았을 뿐더러, 말씀이 새롭고 오 묘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세력이 커지고 베드로의 추종자들이 바울에게 점점 더 많이 쏠려 이제 양쪽이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자, 베드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불가불 어떤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협상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종으로 언제까지나 대립과 반목을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부터 양측에서는 열띤 교리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할 례 지지론할례 폐지론이 팽팽히 맞서 결말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담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처음에 베드로를 찾아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지 14년 후의 일입니다.(2:1)

 

그러나 이때 바울은 교리도 교리지만, 지지 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기 때 문에 자신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해서 양측 대표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역사적인 간부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드디어 베드로가 바울의 할례 폐지론을 인정 함으로써, 교제의 악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15:7, 2:9)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역사도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힘의 밑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쪽이 진리라 하더라도, ‘너는 너, 나는나로 피차에 평행선(平行線)을 달릴뿐더러, 반목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국을 보십시오. 몇 십 년 전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 사람이라면 우습게 대했으나, 근 래에 와서 원자탄, 수소탄도 만들어 제법 실력을 기르니까 미국이 탁구 경기다, 만리장성 관광이다 하고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 다. ?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대립될 때 처음에는 강자가 약자를 밟고, 상대방이 어느 정도 커지면 방해 공작을 벌이고, 다음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 협상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은 갈려도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되게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