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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28본문
Part 05. 저 높은 곳을 향하여
Chapter 38. 영적 가나안으로 가는 길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로서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밑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겨간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글자 그대로 평안히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미치지 못한 자란 평안히 쉬는 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끝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안식을 얻게 된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이 안식을 얻으려면 세 단계를 거쳐야 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애굽의 탈출이고, 둘째 단계는 고된 광야 생활의 인내이며, 셋째 단계는 가나안 원주민의 정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 단계를 무난히 거쳐야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둘째 단계에서 그만 실패했으므로, 여호수아가 그 뒤를 이어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의 사명에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즉 모세가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끌어낼 때에는 바로(왕) 앞에서 열 가지 큰 재앙을 내리게 하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는 군대를 양성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내세워 역사하실 때 우리가 예사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모세에게 거짓말까지도 서슴지 않고 시키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여호와의 지시대로 애굽의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면 3일 동안만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출5:3) 그렇지 않으면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식량이 부족할 때 하나님도 책임을 느끼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에게 식량이 떨어지자 만나를 내려 굶주림을 면하게 하고, 물이 말라 갈증에 허덕이면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해 마시게 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면 세찬 바람에 메추라기를 날려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 40년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모세를 원망하고 마침내 우상까지 섬기며 하나님을 외면하는 추태를 부렸으니, 이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여호수아가 패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첫 대결이 여리고성에서의 싸움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도성을 비롯하여 많은 성읍을 차례차례 무난히 점령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셋째 단계, 즉 가나안의 원주민을 모조리 쳐부수는 마무리 작업을 온전히 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원주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여호수아가 철저히 이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삿2:20-22)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미쳐, 여호수아 당시에 살아남은 원주민의 후손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거기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그 보응은 이렇게 철저하고 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여호수아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인정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놈도 살려주고 저 놈도 놓아주다 보니,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준행하지 못하게 되어, 온전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이와 같이 자손만대에 미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상은 육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영적인 가나안, 즉 인간이 죄에서 놓여나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도 세 단계의 시련을 겪고 이겨야만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이고, 둘째 단계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마귀를 소탕하는 군대의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는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는 이긴다.”(계17: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시달림을 받은 것처럼 성도로서의 고난을 감당해야 하며, 또 그들이 원주민과 싸워 이긴 것처럼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인도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한 점이 많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정복한 육적인 사령관이 여호수아였던 것처럼, 천년왕국에 들어간 연후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마귀를 소탕하는 영적인 사령관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마지막 종, 이긴자입니다.(계2:26, 14:16 참조) 여호수아의 경우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마지막 종이 마무리 짓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릴레이 경주와 비교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사람이 뛰는 릴레이 경주에서 승리는 맨 나중에 뛰는 사람이 테이프를 잘 끊는데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마지막 배턴을 물려받게 마련입니다. 영의 역사에서도 나중 종의 사명이 막중합니다. 그는 영적인 릴레이에서 마지막 테이프를 끊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귀를 소탕하기 위해 거느린 하늘의 특공대 수가 14만 4천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12지파의 두령들에게 각각 분깃을 나눠준 것처럼, 이긴자가 성경에 기록된 하늘나라에 들어가 주의 지시에 따라 각 지파의 분깃을 나눠주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바 이긴자에게 주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계2:26)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권세는 ‘이기고 주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계2:25)
나는 앞에서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는데도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요? 첫째 단계를 지나 둘째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련을 견디어야 합니다.
이때는 이를테면 영적인 십자군이 되기 위한 훈련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적과 싸우려면 일정한 기간을 입대하여 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처럼, 영의 군대에서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앞선 주자가 나중 주자에게 배턴을 제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쓰러진 격입니다. 그러므로 나중 주자는 그가 쓰러진 자리까지 후퇴하여 배턴을 이어받아 가지고 뛰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 역사가 오늘날 여러 모로 고전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지을 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아들 솔로몬에게 그 일을 고스란히 물려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솔로몬은 쉽게 성전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처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우리의 역사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의 사명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하나님의 역사지만 양상이 다릅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역사에서 일어난 놀라운 이적, 기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베푼 것이며, 당시에 곧 주의 뜻이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고 또 그렇게 믿은 것도 모세의 언동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앞선 역사에서는 마귀를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에덴동산에도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마귀인데, 마귀를 피해 가지고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모두 짐승에게 경배하고 마는 것입니다.(계13:8)
영화의 간판 한 번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면서도 믿음을 지킬까말까 한 사람들이 어떻게 마귀와 겨루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두 이긴자의 사명이 다른 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마귀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하여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하늘에서 오는 은혜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에서는 신앙촌과 같은 울타리도 필요 없습니다.
앞선 역사에서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이슬을 받았다, 생수를 체험했다, 또 무엇을 보았다 등등. 그러나 이런 은혜의 체험만 가지고서는 영의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가운데 접어들어야 합니다. 아니꼬워도 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날고뛰고 해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수가 채워질 때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성경 말씀대로 천지 이변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십시오.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니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