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2 - Chapter 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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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
[6권] Part 02 - Chapter 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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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말씀의 갑주를 입고  

Chapter 04. 주님을 에워싼 군상 (3)


5) 주님과 삭개오

삭개오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그가 복음서에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은 주께서 기억하여 자주 입에 올렸기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삭개오는 복된 사람입니다. 더구나 삭개오는 돈 많은 세리장,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서장쯤 되는 사람으로, 백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무서원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지만, 주님 당시에는 기생만큼이나 천하게 여겼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꾼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이 방면에 얼마나 유능하면 세리장이 되었겠습니까?

 

그런 삭개오는 주님의 소문을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주님은 사람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으므로 키가 작은 삭개오는 도저히 주님을 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별로 치하할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열성을 주님은 가상하게 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비결의 하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기억을 받으려면 반드시 큰 공로를 세워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헌금한 동전 한 닢을 귀히 보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쳐다보고, 그 날 밤에 그의 집에 가서 유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중심을 뚫어 보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분이 자기 집에서 묵어가겠다니, 그보다 더 반가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천한 세리장 삭개오를 대하는 태도는 유대의 관원 니고데모를 대하는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삭개오와 니고데모는 똑같이 주님을 존경했으나, 전자는 체면 불구하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뽕나무 위에 기어 올라가 주님을 똑똑히 보려고 했으며, 후자는 위신 때문에 밤에 남의 눈을 피해 주님을 만나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숙소에 찾아오고,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즉 이렇게 대우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처럼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께서 천한 죄인(세리)의 집을 찾아간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수군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날 밤 자기 집에 오신 주님에게,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즉 주님에게 그만한 재산을 헌금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삭개오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자격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언제나 약하고 천한 자를 불러서 강하고 귀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강자는 예루살렘 성에 있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권을 쥐고 성경에 밝아 은연중에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정작 그 주님이 나타나자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주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예루살렘 성을 가리켜,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으리라.”(19:43-44)고 저주했습니다. 주님의 이 저주스러운 예언은 주 후 70년이 지나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화려한 예루살렘 성은 로마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혀 쑥밭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나귀 새끼 등에 얹고, 그 위에 예수를 태우고, “찬송하리로다. 주의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19:38) 하고 소리소리 외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일부 바리새인들은 주님에게 충고했습니다.

 

선생님, 저 제자들의 주책을 좀 책망하셔야겠습니다.”

이들 바리새인은 주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선생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들에게 올바른 믿음이 싹틀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대답했습니다. “참견 말아라. 만일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입을 열어 대신 소리 지를 것이다.”(19:40)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똑같이 주님을 따르면서도 믿음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이렇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적극성을 띠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열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한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개로 비유하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고 극성스럽게 애걸하여 소원을 풀었던 것입니다.(15:27) 이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여간한 열성이 아닙니다.

 

신앙은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데서 자라게 됩니다. 아니,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정성을 다하게 마련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큰일도 소홀히 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려서 넘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신앙을 먼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작은 일부터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께서 기억하십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제2, 3의 삭개오가 계속해서 많이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6) 주님과 세례 요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역사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 크게 양분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 중간에 세례 요한이 물의 사자로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신구약 두 시대의 과도기에 종으로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에 큰 몫을 담당하였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영의 세계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예수가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놓고도 육적인 문제로 의심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은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예수를 의심하고, 제자들을 주님에게 보내어 그 정체를 재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얼빠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인물인 주의 길 예비자로서 있을 수 없는 큰 실수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영의 세계는 그만큼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요한이 주님을 의심하게 된 이유는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란 무엇일까요? 요한은 옥에 갇힌 후에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에 대해 여러 가지 언짢은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11:19) 운운하는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것보다 언제나 육적인 것이 먼저 머리에 떠오릅니다. 여기 죄인의 친구란 예컨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천한 여자나 세리를 가까이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거느리고 사방을 전전하면서 하늘의 도를 전하였으므로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고, 때로는 제자들을 보내어 돈을 구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주님을 외면하였으므로, 주님은 제일 천시를 받는 세리나 심지어 기생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들을 가까이한 것은 물론 죄인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였지만, 이들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나 기생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과 거리낌 없이 상종하니 평이 나쁘게 나돌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였습니다. “, 이것 봐라! 그리스도가 이럴 수가 있나? 당신을 증거하다가 옥살이를 하는 나를 빼낼 생각은 하지 않고 천한 사람들을 가까이하면서 돈을 우려내다니, 내가 혹시 잘못 증거한 게 아닌가?”

 

이리하여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까?”(11:3) 하고 질문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표현은 점잖지만, 까놓고 보면 당신이 가짜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반문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기가 막혀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여라.”(11:4-5)

 

주님은 주로 육적인 이적과 기사의 내용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일렀던 것입니다. 그 이상의 깊은 말씀을 전해도 세례 요한에게 먹혀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나 그 제자들에게 매우 불명예스러운 책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병이나 고친다고 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증거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서는 상대방의 심령이 어려 그 이상의 말씀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그때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리는 사람이 바로 메시아라는 통고를 받았으므로 비로소 예수가 당신이 증거해야 할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3:17)라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세례 요한만은 주님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또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즉 알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는데, 의심은 사람으로부터 들어서 했으니, 이것은 세례 요한의 큰 불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쇠해도 그는 흥해야 한다.”(3:30)고까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여드린 그가 제자를 주님에게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우문(愚問) 중의 우문을 던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을 훼방한 죄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히 가르침을 받고도 이를 믿지 못하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고 말씀했으며, 이 말씀이 떨어지자 세례 요한의 목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당신을 의심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님을 의심하였습니다. 그 후로 주님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인물인 세례 요한이 자기를 배반하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16:15)하고 제자들의 마음을 떠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피차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 중에 주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는 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실족하는 자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긴자의 증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고도 이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세례 요한의 전철을 밟는 것이 됩니다. 물론 떨어지는 당사자에게는 자기를 정당화할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육적인 것일 때, 엄밀히 말해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일로 의심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가령 앞선 역사처럼 은혜가 희미해졌다거나, 생수의 능력이 약해졌다거나 하면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입김을 불어 만든 생수로 시체가 변화되지 않는다든지, 내가 안찰하였는데 마귀가 물러가지 않는다든지, 내 말이 성경에 어긋난다든지 하여 나를 의심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변동이 없는데도 의심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내가 마귀의 편에 서 있다면 나를 통하여 신령한 것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