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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본문
Part 02. 말씀의 갑주를 입고
Chapter 05. 이것이 이긴자이다(3)
5) 예언된 종으로서의 이긴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6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꾸준히 역사해 오시는 가운데, 주님 이외에도 예언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언된 인물은 하나님께서 내정한 일꾼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기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계3:12)
이 예언된 인물은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선지자나 주님 당시의 사도와도 다르며, 미리 성경에 이러저러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타나 움직여야 하며, 그의 행동반경은 일정한 테두리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성경에 비추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권능과 은혜와 말씀이 성경에 예언된 내용과 부합되면, 그는 그 장본인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이 예언된 인물로서 그 권능이나 사명으로 보아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긴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긴자의 출현에 대해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는 바입니다.
일찍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 것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으나, 오늘날 성경을 올바로 보는 성도는 “이긴자가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인가?”가 아마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긴자는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그 증인이 되어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긴자는 자기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 피 권세로 세워서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의 충실한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그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의 책임은 막중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소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선 하나님의 역사의 경우가 그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두 사람 혹은 몇 사람이 계약을 맺고 어떤 사업을 할 경우에, 이들 동업자는 그 계약을 지켜야 하며, 결코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성경에 뚜렷이 밝힌 언약은 당신의 권위를 위해서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예언된 인물이 나타나 역사할 때, 하나님도 제약을 받게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언된 인물도 인간이며, 설사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더라도 한편 그만큼 마귀의 도전도 극심하므로 모처럼 내세운 그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즉흥적으로 이긴자를 통하여 전무후무한 큰 권능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긴자란 일정한 하늘 군병의 수를 채워 주께서 재림할 여건을 마련하라고 세운 하나님의 마지막 큰 종입니다.(계6:11, 20:4 참조) 다시 말해서 이긴자, 곧 ‘온 세상의 주를 모신’ 감람나무는 재림주의 길 예비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느 부흥사나 목사, 아니 사도들과도 다릅니다.
다른 이들은 마땅치 않으면 딴 사람으로 대치할 수 있지만 이긴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기는 자는 하나님성전에서 다시 나가지 않는다.”(계3:12)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긴자는 흔들리거나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보장이 없이는 그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하늘에서 먼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잘하든 못하든 예언된 인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영수가 단을 지키든 말든, 이긴자임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이긴자 시대는 한 번뿐이며, 이 세대가 지나면 다시는 이긴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슥14:7-8 참조)
천지가 없어져도 성경에 기록된 두 감람나무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6년 동안 이 역사에 동참하여 보고 듣고 받은 것이 많지만, 아직도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올 뿐, 감람나무가 무엇이며, 이긴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아는 분이 몇 되지 않습니다.
이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믿음이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이영수가 어찌 탄탄대로를 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영수를 통하여 불과 이슬과 생수의 성령을 받고, 향취를 맡고, 신령한 이상을 보고, 오묘한 말씀을 듣는 등, 이것이 무슨 역사라는 것을 알고도 남을 정도로 체험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긴자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이 역사에 동참한 여러분까지도 아직 이긴자에 대해 은혜가 많은 부흥사나 목사 정도로 알고 계시다면 이긴자가 이긴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이긴자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긴자도 여러분과 똑같이 하루 세끼 밥 먹고사는 인간입니다. 자연인 이영수가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귀가 나 하나를 꺾으려고 혈안이 되어 백방으로 괴롭히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긴자가 쉽사리 꺾인다면 일반 목사나 부흥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긴자에게 아무리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야 그것은 이긴자와는 무관합니다. 왜? 이긴자는 자기 사명을 잘 수행하고 수행하지 못하는 차이는 있어도 죄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슥13:1, 계21:6-7 참조)
만일 죄를 짓는다면 그는 이긴자가 아닙니다. 이긴자는 하늘에서 마귀가 침범 못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그만한 보장을 해 주지 않으면 빈 주먹으로 시작한 이 역사는 벌써 산산조각이 났을 것입니다.
이긴자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같은 배를 탄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쯤’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역사의 특징입니다.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물건을 몰래 취했을 때 하나님은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진노했던 것입니다.(수7:1)
육적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도 이렇거늘, 하물며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여러분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고 주시하는 이 역사에 동참한 여러분이 각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움직이면 하늘에서는 구하지 않아도 더욱 큰 축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각자 주의 역사를 위해 어떻게 힘쓰며,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입으로는 “면류관과 바꿀 때까지 주의 십자가 붙들겠네.”하고 찬송하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한다면 그 장본인은 물론, 우리 역사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그 인격을 존중하는 믿음으로 예수를 믿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많이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이긴자를 만난 보람이 없게 됩니다. 전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여러분이 각자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충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촐랑거리지 않고 잠잠합니다. 사랑이 메말랐을 때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이긴자의 손길을 통하여 남들이 그토록 애써도 받지 못하는 성령을 값없이 받고도 만날 그 타령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받는 은혜가 클수록 책임도 무겁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6) 사도 시대와 이긴자 시대
하나님의 역사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로 크게 양분되어 있으며, 신약 시대는 다시 사도 시대와 이긴자 시대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는 영적인 은혜가 미약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는 평신도는 물론 선지자까지도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모세나 이사야와 같은 큰 종들도 지성소에 가지 못하고 대기 상태에 있다가, 주께서 십자가에 피를 뿌리고 운명하고 부활하신 후 무덤에서 일어나 거룩한 성, 곧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입니다.(마27:53) 그러기에 주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고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요10: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희한하나,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모든 신령한 구절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소화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영적인 말씀을 깨우치게 하십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제시하는 증거도 확실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증거는 더욱 확실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현세가 아니라, 영원히 생존하는 내세를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원하는 그 영의 세계가 없다면 기독교는 그 진가(眞價)를 상실할 것입니다. 이 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는 성령의 보증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 세계보다도 죽은 후에 몸담을 그 세계가 더욱 소중합니다. 나는 성경을 상고하면서, 내가 이상 중에 본 그 세계에 대해 여러분에게 단편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그 피 권세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지성소에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도 인간의 영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언제든지 인간의 영을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당신의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삼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들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이 땅의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불명예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동안 어쩔 수 없이 하나님도 적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속죄의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것은 이 적을 물리치기 위한 획기적인 작전의 일환이요, 하나의 비상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귀한 존재로 계시던 주님이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토록 심한 곤욕을 당하고 승천하신 후에 사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와 바울이었습니다.
이들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무참히 처형된 주님이 그토록 중한 죄인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였다는 것을 강력히 증거하여 기독교의 기틀을 세웠던 것입니다. 특히 사도 시대의 대표적인 주의 종이며, 또한 신학자인 바울에 의해 기독교 교리가 수립되고,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는 비단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말하면 근 이천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 동안 주님은 불과 같은 성령으로 세계 각처에 걸쳐 역사해 왔으며, 성도들은 믿음이 돈독하여 순교하면 하늘나라에서 왕의 반열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계20:4-6)
그런데 사도 요한이 예언한 이긴자의 시대가 되면 양상이 달라집니다. 즉 사도 시대는 한 증거(불)의 성령으로 역사했으나, 이긴자 시대에는 세 증거(불, 이슬, 생수)의 성령으로 역사하며, 그만큼 은혜의 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성경에 감춰진 비밀의 말씀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즉 그를 따르는 수가 적든 많든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일관하여 하나님께서 줄곧 움직여 왔지만, 시대에 따라 독특한 섭리가 베풀어졌습니다. 예컨대 모세 시대와 바울 시대에 각각 특이한 하나님의 섭리가 베풀어졌으며, 오늘날 이긴자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공통된 점이 있다면, 어느 시대나 그 섭리의 주인공들의 길은 순탄치 못하여 풍파가 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구태여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요컨대 적(마귀)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이긴자 시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기틀을 마련하는 중대한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긴자에게 큰 권능을 부여하여 단시일에 의로운 하늘나라의 군병을 배출시켜 그 일정한 수를 채우게 함으로써 주의 재림을 예비하고, 끝내는 하늘나라가 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거창한 역사가 어떤 지역에 걸쳐 어느 정도의 규모로 베풀어지는가는 하늘에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찬송가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날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하여, 썩을 것이 썩지 않을 신령한 주의 귀한 형상을 닮게 되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 나라는 육을 입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은 무익하다.”(요6:63)는 것입니다. 바울은우리가 그 날에 홀연히 변하여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3)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신령한 몸도 일정한 형상을 입고 있습니다. 이처럼 형상을 갖고 있는 점에서는 이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육의 형상은 이 세상에서 살기에 알맞고, 영의 형상은 그 세계에서 살기에 적합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하신 주의 귀한 형상입니다. 잠시 왔다 사라질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형상과 세세토록 살아갈 그 세계에 사는 인간의 형상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세계에서 살려면 죽지 않고 썩지 않을 형상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탈바꿈을 ‘거듭난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으나, 죄에 빠져 그 형상이 바뀌어졌습니다. 즉 영의 형상에서 육의 형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본래의 형상대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회복’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인간 회복을 위해 장장 육천 년 동안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 어째서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단번에 재깍 해치우지 않고 육천 년 동안이나 끌고 계실까요? 해치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치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전능하신 줄만 알았다가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의 세계는 둘로 크게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마귀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이 두 세계에서 인간의 형상은 죄를 벗어버린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죄에서 벗어나 신령하게 이루어질수록 주의 형상을 닮고, 죄를 많이 질수록 마귀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진 정도에 따라서 자연히 서열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죄에서 벗어나 주의 형상을 닮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긴자를 통하여 베푸시는 새로운 섭리 안에 당신의 백성들이 들어와 은혜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예수를 아무 데서나 적당히 믿기만 하면 되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긴자의 시대입니다. 나는 우리의 역사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