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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1.08본문
Part 05. 진리의 등대
Chapter 33.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과 할례
기독교란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필요로 하여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잠깐 더듬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본위의 종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부르심을 받은 인간 위주가 아니라, 불러 주신 하나님 위주의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연고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었던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시대에 따라 역사하시는 섭리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할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피의 언약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남자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했으며, 만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남자에게 연결된 모든 식구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미리 예정한 일을 실천하기에 앞서 당신의 종과 언약을 맺으며, 일단 맺은 언약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절대로 폐기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런 언약이 없다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축복도 형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언약은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주님을 아브라함의 뿌리라고 말하지 않고 다윗의 뿌리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낼 언약을 아브라함이 아니라 다윗과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시16:9-10, 22:14-18참조)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언약대로 이 땅에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땅에서 실제로 이루어지자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자는 살고, 믿지 않는 자는 죽어야하는 무서운 시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 걸리지 않는 자는 건짐을 받고, 걸리는 자는 쓰러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따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고 응답을 하시려는 것이 그 뜻이자 섭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제쳐놓고 밤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해도 그것은 헛수고에 그쳤습니다. 주님 당시의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다 이런 헛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밖에서 아무리 소리 높이 하나님을 불러도, 그 기도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위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사울이 하나님께 올린 정성어린 제사(삼상15:22)와 회심(回心)하기 이전의 바울의 충성(행9:1 이하)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며,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 이중성에 있습니다. 하긴 동물에게서도 개의 충실함이나 개미의 부지런함 같은 정신 작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은 본능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등 뒤에서 교묘히 조종하는 것이 곧 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일 경우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되고, 마귀의 신일 경우에는 마귀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신이 서로 인간을 통하여 암투를 계속해 온 것이 인류 역사입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배후에 하나님의 신이 계시고, 이방인의 배후에 마귀의 신이 도사려 서로 겨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등에 업고, 이방인은 마귀를 힘입어 싸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면 싸움에 지게 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싸움에서 이기게 마련이 었습니다. 이것이 곧 구약 시대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는 두 신이 겨루는 양상이 다를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을 멀리하지 않도록 묶어놓은 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입니다. 그 후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모세의 율법을 지켜도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떠나서 율법을 생각할 수 없고, 율법을 떠나서 할례를 논할 수 없을 만큼 할례와 율법은 긴밀한 관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할례와 율법은 구약의 골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들을 가장 개화된 애굽에 인도하였으나, 이들은 다신교(多神敎)의 나라 애굽에 400년이나 정착하여 사는 동안에 자연히 우상을 섬기는 애굽의 종교와 풍습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어떻게 섬겨야 기뻐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여 우상에게 절하면서도 마음은 태평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면서도 그만큼 선, 악의 관념이 흐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고, 하지 말라는 일을 하지않는 것이 선이며,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하라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해라, 말아라,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정한 규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행동지침으로 제정 반포한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율법은 모세 이후 주님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장 1,400년 동안이나 대를 이어 준수해 왔으나, 새 율법의 주인공인 주님 자신도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 아래 태어났으므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는 순간, 할례와 율법과 아론의 반차에 속하는 제사장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5:8-10 참조)
그럼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지키게 한 할례와 율법을 폐지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륜을 펴나가는 마당에서 지상의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지가 발달됨에 따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하늘의 도를 전파할 필요를 느꼈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모세 율법에 미비한 점이 드러나고 부작용도 일어나 새로운 법도를 반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해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하고만 상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 언약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폐기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못미더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하나의 부질없는 가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인간과 어떤 언약을 맺은 후 자고로 인간이 범죄하여 그 언약을 이행치 않은 일은 허다했지만 하나님께서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후손들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가나안 일경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언약이니라.”(창17:7-10)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이 언약도 그대로 지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만 선지자를 내세워 지시를 내렸으며, 따라서 이방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 하와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은 끝내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갱신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지 않고 마음대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폐기하고 이방인과 상종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분이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비천한 농사꾼이나 어부들을 모아놓고 던진 시골 청년의 이 말은 남을 웃기기에 꼭 알맞았으나, 사실은 매우 두려운 이야기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으므로 중요한 말씀은 운만 떼어놓고,바울을 내세워 할례를 폐지시키고 새로운 율법(자유율법)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에는 수세(守勢)에 몰려 할 말을 못하고 은인자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폐지시키는 사명을 맡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하게 한 것으로도 짐작 할 수 있습니다.(행16:3) 바울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부질없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잠정적으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켰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수제자로 부친은 헬라인이고 모친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물론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제자로 삼을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남의 이목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할례를 폐지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하는 것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국법으로 간주하고 지켜왔으며, 이를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국가에 이중으로 범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폐지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설사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용납할 수 없는 이중 범법자로 간주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사명을 맡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도 그 종을 신중하게 택해 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의 종으로 택함을 입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당시에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이요 ‘주의 증인’인 스데반을 핍박하여 피를 흘리게하고,(행22:20) 예수를 믿는 자들의 집에 들어가 남녀를 막론하고 무조건 끌어내어 감옥에 넘겨 버리는 등,(행8:3)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서는 그 뜨거운 충성심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시고 하나님에 대한 사울(바울)의 갸륵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당신의 종으로 택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의 제자들을 잡아서 예루살렘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그에게 일대 경종이었으며, 신앙에 180도의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지만, 그는 당시에는 자기의 사명이 얼마나 무겁고 중대한지를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후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이상 중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지시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께 몸 바쳐 충성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큰 부덕과 죄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도를 돌변하여 전에 자기가 잡아 죽이려던 자들의 편에 서서 열렬히 주님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치 않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죽일 놈으로 몰아세우고, 한편 주의 사도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할례의 폐지를 주장한다고 해서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양자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곤욕을 치러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베드로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베드로는 아래로 열한 사도와 120문도를 거느리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난데없이 나타나 신도들을 상대로 딴 소리를 하니 말발이 설 리가 만무했습니다.
즉 베드로와 바울은 같은 불의 성령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섬기지만, 전자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후자는 자유의 율법을 내세워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상으로 보면 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양자는 똑같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사람들에게 안찰하여 성령을 부어주었으나, 베드로는 옛것(모세의 율법)을 가르치고, 바울은 새것(자유의 율법)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상에서는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전통과 혁신의 대립으로 2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께서 같이하지 않고, 바울은 주께서 같이하였기 때문에 베드로의 교세는 점점 약화되고, 바울의 교세는 날로 흥성하여, 드디어 베드로는 바울의 주장을 시인하고 말았습니다. 즉 바울의 할례 폐지론이 주님의 지시임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베드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바울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복음은 전 세계 방방곡곡을 향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