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5 - Chapter 34

페이지 정보

DATE. 2025.01.13
[6권] Part 05 - Chapter 34

본문

Part 05. 진리의 등대

Chapter 34. 신비로운 은혜 체험에 대하여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므로 신앙 가운데 접어들면 여러 가지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긴자 감람나무가 역사하는 시대는 특히 그렇습니다. 이때가 되면 그 가지들이 마땅히 전무후무한 세 증거(, 이슬, 생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체험을 다 신령하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마귀도 신기한 장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광경을 교계에서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영을 분별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신령한 체험은 성령의 역사로, 사도 시대 이후 근 이천 년 동안 불의 성령을 내리고, 오늘날 이긴자가 역사하는 시대에는 세 증거의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섭리 안에 계신 여러분이 산 체험에 의해 잘 아는 사실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러분의 은혜 간증을 들어보면 불을 받아 온 몸이 화끈거렸

다는 분, 전신을 생수로 씻어 내리는 것처럼 시원함을 느꼈다는 분, 혹은 단상에 이슬이 뽀얗게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분, 향취를 맡았다는 분, 이 밖에 여러 가지 신령한 체험들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로 성령이 강하게 임한 증거입니다.

 

그럼 이런 체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을 전혀 받지 못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주일을 맞아 남들은 들로 산으로, 혹은 극장으로 놀러 가는데, 지금 이 시각에 원근 각처에서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령의 감동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적인 느낌은 없어도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그 성령을 받은 정도가 강하고 약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즉 성령을 강하게 받았을 때에는 감각적으로 느끼게 되고, 약하게 받았을 때에는 그런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벼운 미풍은 우리의 피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서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거센 바람은 피부로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강한 은혜 체험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앞선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누구나 쉽사리 은혜 체험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의 역사에서는 힘써야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이미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는 방법의 하나가 새벽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이때 정성을 기울이기 때문에 은혜를 쉽사리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기를 너무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꼭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고 굳게 마음에 다짐하고 제단에 일찍 나와 앉아 눈을 말똥거리면서 은혜 오기를 기다리면 오히려 은혜가 오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노력 없이는 오지 않지만, 노력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론 이런 신비로운 은혜 체험을 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그 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직하는 것이 더욱 소중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는데 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도 내일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벌써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분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뜨겁게 달아오르던 가슴이 어느새 냉랭하게 식어 버려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은혜를 간수하지 못하고 쏟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받고 나서 범죄하면 그 은혜가 곧 끊겨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가 아주 떠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체험을 한 후에는 범죄하지 말고, 주님께 더욱 충성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간직하는 비결입니다.

 

은혜를 받기만 하고 열성을 내지 않으면 조만간 그 은혜는 희미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만큼 분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찬송을 부르고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않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두 유형(類型)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에 선 신앙이고 또 하나는 체험에 의존한 신앙입니다. 이 양자는 확연히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전자는 이론이 서 있는 반면에 은혜 체험이 부실하고, 후자는 은혜 체험이 많은 반면에 이론이 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볼로의 경우가 전자에 속하고, 베드로의 경우가 이 후자에 속합니다. 이상적인 것은 이 양자가 병행되는 경우로, 바울 같은 분이 이에 속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한 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대체로 신비로운 은혜 체험과 믿음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체험하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면 은혜 체험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이것은 가장 바람직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은혜 체험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따르기도 합니다.

 

신령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기억하시는 줄 알고 교만에 빠지거나, 체험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식이라도 된 줄 알고 낙심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주님과 나 사이가 얼마나 가까이 좁혀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듬고 은혜로 다지는 것도 요컨대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을 제거하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죄는 주와 멀어질 때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에서는 주님과 자기가 멀어지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주님과 멀어지면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아도 세상의 온갖 잡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주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 기도를 할 때 자기가 기도할 내용을 미리 머릿속에 넣고 있어도, 막상 입을 열면 딴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가 일쑤인 것입니다. 이 경우에 기도의 내용을 미리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자기 입을 통하여 말씀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자기의 거리가 아주 좁혀져서 세상이 간 곳 없고 주와 자기만 있을 때에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습니다. 미움, 시기, 비방, 중상, 이 모든 것이 다 눈 녹듯 사라지게 마련이며, 마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까지 도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