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5 - Chapter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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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1.13
[6권] Part 05 - Chapter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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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5. 진리의 등대

Chapter 35. 주님은 왜 안식일을 범했는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움직이신 33년의 행적은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서는 각각 특색이 있지만 그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된 것은 마가복음으로, 거기에는 청년 예수의 인간적인 성품이 비교적 소상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다정다감(多情多感)한 모습과 초인간적인 권능이 제일 돋보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서 기를 펴지 못하고 억눌려 살아왔습니다. 이들 중에는 로마 당국에 아부하여 출세한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애국자와 일반 대중은 로마의 사슬에서 풀려나 버젓한 독립 국가의 백성이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이들이 초인간적인 권능을 행사하는 예수에게 독립투사로서, 또는 독립된 새 나라의 왕으로서 큰 기대를 건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의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초연히 떠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의 사명은 구국(救國)에 있지 않고, 구령(救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주님은 오늘날과 같이 교회의 단상에서 설교하신 것이 아니라,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주로 노방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은 우선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기 위해 신유의 은사를 위시하여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이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왔다 하면 금세 많은 병자들이 줄을 이어 모여들었으며, 성한 사람들은 예수가 병 고치는 이적을 구경하기 위해 역시 떼를 지어 운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서는 병 고치는 일보다도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 소중하고 시급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병을 고쳐 주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금세 시시하게 생각하여 뿔뿔이 흩어지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이 어떻게 설교다운 설교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껏 비유로 몇 마디 운을 떼고 마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팔기 위해 음악이나 요술을 하여 길가는 사람들을 잔뜩 모아놓고 나서, 나중에 약을 팔려고 하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사라져 버리고 몇 사람 남지 않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을 약장수로 비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당시의 모습을 좀 더 선명히 머릿속에 그려보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경꾼들이 거의 다 사라진 쓸쓸한 빈터에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설교하는 주님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을 구세주로 받들고 우러러보지만, 당시의 예수는 이웃 사람들에겐 목수 아저씨이고, 친척들에겐 형이요 조카이며, 또 친구들과는 네니 내니 하는 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파격적인 언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수의 모습이 콧대 높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 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예수가 바알세불에 씌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

 

당시에 모세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 이날에는 종들에게도 일체 일을 시키지 않고 경건히 하루를 보내었습니다. 러나 주님은 안식일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율법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서기,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이단시되다 못해 마귀(바알세불)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 그런데 어째서 주님은 이처럼 모세의 율법을 예사로 짓밟아 버렸을까요? 저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당시에 주님의 라이벌(경쟁자)은 모세였습니다. 주님과 모세를 라이벌 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아무튼 주님은 모세를 눌러야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 중에 모

세를 제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억한 종으로, 이사야나 다니엘, 에스겔 등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도 모두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모세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율법 아래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좇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며, 그 아들의 존재 가치가 송두리째 없어지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되도록 무시하여 당신이 모세보다 더 큰 존재임을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들이요모세는 종이었으니 말입니다.

 

종보다 아들이 더 큰 존재요, 따라서 아들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었으나, 당시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될 리가 만무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행위는 헛수고에 그쳤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선 모세보다 얼마나 더 큰 존재인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아무리 큰 권능을 가지고 52어의 이적을 비롯하여 놀라운 신유의 은사를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행한 권능도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는 등 어마어마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큰 기사와 이적을 행하여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비슷한 종으로는 인정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여호수아는 태양을 정지시켰다고 해서, 주께서 지구를 송두리째 박살내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을 때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온 것처럼, 당신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이적을 베풀겠으니, 그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물론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3일 만에 다시 사시는 것은 일단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연후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땅에 계실 동안에 어떻게 해서 든지 당신이 모세보다 큰 존재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방법의 하나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마다 일손을 놓고 경

건히 보내는 안식일 날, 제자들을 데리고 전도하러 다니셨고, 가는 길에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제자들이 출출하여 손으로 밀 이삭을 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는 것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 오히려 하나의 애교로 귀엽게 보시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큰 모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일행을 어떻게 보았겠습니까안하무인(眼下無人)의 범죄 집단으로 손가락질했던 것입니다. 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다가와서 엄중히 항의했습니다.

 

당신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도를 전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도 묵인하는 거요?”

주님은 저들에게 대답 대신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그게 뭐가 잘못이오?”

저들은 기가 막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다윗과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밖에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 제자가 안식일 날 밀 이삭을 훑어서 요기를 좀 했기로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소아직 나를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오.”(2:28)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분명히 안식일을 범하는 큰 죄를 저질렀지만, 나님의 아들을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도 거리낄 것 없는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잘잘못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초월하신 분 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제사장보다 큰,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이므로 진설병을 먹어도 죄가 안 되는 것처럼, 주님은 하나

님의 아들로 모세보다 월등한 존재이므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세에게 간섭할 수 있지만, 모세는 주님께 간섭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피 권세로 비로소 지성소에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10:8, 27:53 참조)

 

그러니 그 율법으로 주님을 판단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는 바울의 말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갑니다. 이 안식일을 에워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논란은 판단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요컨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 생기는 영적인 마찰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히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10:34-35)는 주님의 말씀도 이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같은 사례는 오늘날에도 각 가정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느냐, 한 성자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런 불화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영과 영의 대결입니다. 즉 배후에서 영이 인간을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