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Part 02 - Chapter 1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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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1.15
[5권] Part 02 - Chapter 1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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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빛을 찾아서  

Chapter 14. 계시록의 7복 (5, 6)



5)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계시록에는 다섯 번째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의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복은 권세에 직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성경에 세 가지로 크게 나눠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백성을 심판할 권세와 제사장이 될 권세 및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이 될 권세가 그것입니다.(20:4-6)

 

이 부활은 제한된 인간의 분별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날을 얼마 앞두고 비로소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주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에도 말했지만, 주께서 부활하시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26:32) 주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러 갈릴리로 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척척 고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지만, 주님의 크신 사명은 산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은 자를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곧 부활입니다. 인간은 육신이 죽으면 혼은 지성소가 아니면 음부로 가게 마련입니다.

 

첫째 부활이란 요컨대 육이 죽어서 혼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을 거쳐 영원히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불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천국과 지옥은 이때 비로소 갈라지게 됩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어떤 사람은 천당에 보내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내다니, 이런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듯한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적이 있기 때문에 피차의 규례상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 안에서 인생을 통찰하고 마귀의 존재를 올바로 인식할 때, 우리는 천당과 지옥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밑받침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앙 체험입니다. 이 신앙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엄연히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이 부활의 여건을 마련한 것이 바로 주님입니다. 즉 주님의 피 권세로 우리에게 부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와 같이 큰 인물들도 주의 피가 아니면 부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은 주께서 피를 흘리고 운명하시자 그 영이 무덤에서 뛰쳐나와 첫째 부활에 참여했던 것입니다.(27:53 참조) 부활은 이와 같이 영이 사는 것이며, 육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실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입니다. 주께서 이기는 자에게 생수를 유업으로 주어,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시는데,(21:6) 이기는 것도 주의 피 권세요, 물을 피되게 하여 생수를 만드는 것도 주의 피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귀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보혈의 능력까지도 마귀가 흉내 낼 수 있다면 십자가의 권능은 땅에 떨어질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는 도덕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지성소에 가 있는 순교자들이 주님께 마귀를 처단하여 피 값을 갚아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6:10) 이때 주님은 저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고 의로운 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타일렀습니다. 흰 두루마기는 주의 아내가 입을 예복, 곧 흰 세마포 옷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땅에서 흰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없는 여건, 즉 주의 피 권세로 말미암은 생수가 임하지 않은 시대에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거룩한 성안에 들어간다는 약속을 받지 못했으나,(11:13) 순교로 말미암아 지성소에 들어가 이때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흰 두루마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고 땅에서 이미 세마포를 입게 된 성도는 주님으로부터 새삼스럽게 흰 두루마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음부에 갇혀 있는 혼들은 마귀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했을 때,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이 끝난 다음에 주께서 내놓게 되어 있습니다. 음부는 지성소에 가게 마련인 순교자 및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심판 때까지 대기하는 장소입니다.(6:8) 이들은 천년세계가 지나 심판 때 부활을 하게 되며, 이것을 둘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될 자들도 일단 음부에 가두는 것은 천년세계 이후의 환난 때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짐승에게 경배한다.”(13: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무저갱은 문자 그대로 끝없는 어둠의 세계요, 마귀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계시록에 또 내가 보니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1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20:1-3)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있는 열쇠쇠사슬이니 하는 말들은 상징적인 표현이며, 용을 비롯한 모든 마귀의 무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에워싸는 것입니다. 이 울타리에 접근하기만 하면 마귀는 눈 녹듯 사라지므로 얼씬도 못합니다. 그만큼 성령의 능력이 강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능력이 약하면 마귀가 뛰쳐나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세력을 온전히 차단하려면 하늘 군대의 수가 차서 천년세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마귀를 무저갱에 가둔 후에 천년세계가 이루어지면 하늘의 군병들은 마지막 싸움, 즉 아마겟돈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곳이 광야, ‘입니다. ‘거룩한 곳에 미운 물건이 설 때다시 말해서 마귀가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에워쌌을 때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마귀를 소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죽지 않습니다. 육은 죽어도 혼은 영원한 복락이 아니면, 세세토록 고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말은 하나의 상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이긴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2:11) 여기서 말하는 둘째 사망이란 심판을 거쳐서 영원한 불 구렁텅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첫째 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어서 음부에 끌려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살아서 주를 맞을 때까지 주의 아내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성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첫째 사망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모태에서 죽었건 100세의 장수를 누렸건 간에 육의 장막은 조만간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진실히 믿는 사람은 이 장막이 무너지면 육신은 썩고 혼은 주의 영과 결합되어 부활체가 형성됩니다.

 

알기 쉽게 숫자적으로 풀이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를 믿어 그 혼이 생전에 70%만큼 깨끗이 이루어졌다면, 나머지 30%의 더러운 혼은 주의 것으로 대치됩니다. 그리하여 부활체를 보면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마귀의 편에서 움직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인간의 피가 주의 피처럼 맑아지고, 핏속에 있는 혼이100%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주의 피와 합쳐서 100%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불 구렁텅이에 들어가는 사람은 죄상에 따라 고통을 받게 됩니다. 즉 같은 지옥이라도 10가지 죄를 지은 사람과 100가지 죄를 지은 사람은 고통의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행한 대로 보응한다.”(16:27)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응해지게 됩니다. 처럼 공의로우신 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지옥에도 서열이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성소에 있는 역대 하나님의 사람 중에서 지금 현재 제일 앞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종은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자기 영광을 취한 적이 없으며, 그가 자기 것으로 소유한 것은 오직 목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물질이나 이성 문제에서 멀리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의가 출발은 화려했으나 끝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 예의 하나로 세례 요한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예언된 인물이요, 주의 길 예비자로서 처음에는 일을 썩 잘 했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쇠해도 그는 흥해야 한다.”고까지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뒤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의심한 연고로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공로는 결국 다 사라져 버립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귀한 하나님의 역사에 부름을 받아 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거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어떤 환경에서도 주를 의지하는 마음이 변치 말아야 합니다.

셋째, 부득이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넷째, 어떤 경우에도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만일 여기에 저촉되는 사람이 있으면 주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고쳐야 합니다. 아무쪼록 내 말을 명심하여 한 사람도 낙오되지 말고 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주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

여섯째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의 복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을까요? 다른 성경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없다는 걸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 중의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자상한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주님을 비롯하여 사도들과 여러 선지자들의 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들은 모두가 시대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금부터 약 2천 년 전, 가버나움이나 나사렛, 예루살렘 등지에서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농부, 어부, 장사꾼을 상대로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그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만일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에 나타나 설교를 하신다면 그 내용이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다 못하시고 보혜사 성령에게 미루신 것은(16:12) 당시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나 지적으로 수준이 낮아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면 주님의 언약은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못하신 말씀이 터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땅에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2:9)로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주님을 무작정 신격화하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이 하늘나라에서 신의 존재로 계시다가 잠시 천사보다도 못한 존재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조금도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이 땅에 육을 입고 손님으로 오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에 힘입어 역사한 바울의 경우를 보면 주님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승천하여 영광 중에 계신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지시에 따라 역사했으므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1:8)고 했으며,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3)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울 안에 있는 성령이 천사보다 우위에 있음을 언명한 것으로, 지당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도망치는 제자와 추종자들을 상대로 설교하였지만, 바울은 주님을 어느 정도 아는 청중을 상대로 설교했으니 그 내용이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듣는 사람의 신앙 수준에 맞춰서 나가게 마련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중학생 수준의 글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중에서 계시록의 말씀이 제일 깊이가 있습니다. 승천하신 주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지상에 계신 주님만큼 심한 구속을 받은 경우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줄곧 매어 살았습니다. 설교도 맘대로 못하고 모든 일거일동을 예언에 따라 움직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깊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해도 주님은 당신의 한계 밖의 것은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고 물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베드로에게서 다짐을 받고 나서 양을 먹일 것을 부탁했습니다. 즉 주님 대신 목자의 사명을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순교 당할 것도 아울러 예고했습니다.(21:18)

 

이때 베드로는 꽤 당황하고 또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살아서 맞이하고 싶어 하던 베드로에게 이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터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주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말이냐? 그는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게 하겠다.”

베드로는 무척 섭섭했습니다. 수제자인 자기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고, 요한은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심정을 환히 꿰뚫어 보시고 덧붙여 말씀했습니다.

 

너는 그런 일에 상관 말고 내 말대로 하여라.”

그래도 베드로는 마음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자기만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에 대비한 큰 일꾼으로서 사도 요한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전도에 주력하고, 사도 요한은 다시 올 당신을 맞아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예언자의 역할을 담당해 줄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에게 계시로 당신이 다시 오시는 절차를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다시 속히 가려고 하지만, 그냥은 못 간다. 이긴자가 나타나 마귀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십자가의 군병을 채워 길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나라는 이러저러하게 이루어진다.”고 상세히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긴자란 주의 피 권세로 덮어 둔 계시록의 뚜껑을 여는 자요, 종말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긴자가 나타나야 그 입을 통해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분명히 알아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