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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1.28본문
Part 05. 저 높은 곳을 향하여
Chapter 40. 귀가 있으면 들으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천 층, 만 층이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3:17)라는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겉보기에는 고르지 못한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괴로움 가운데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각자 으레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보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좀 나은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적’ 나은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거기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인간은 자기 본위의 주관적인 생각에 빠지기 쉬워, 여건이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것처럼 확대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행복은 육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를 우리 안에 영접할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끼니가 떨어져도 그만, 병들어 죽게 되어도 그만, 마음은 무사태평합니다. 왜? 굳게 의지하는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도와주시랴 하고 내어 맡기게 됩니다. 이 경우에 주께서 사실상 어느 모로나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큰 은혜의 사슬에 매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은혜가 떠나 냉랭하게 되면 그보다 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제일 불행한 것은 은혜를 놓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하여 당신을 공경하고 따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전력 투구의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때 거기 설사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이를 너그럽게 용납하지만, 적당히 믿을 때 하나님은 섭섭히 여기시는 것입니다.(계3:15)
하나님은 구약 시대와는 달리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컨대 초상집에 가서 송장을 만지다가 예배 보러 허겁지겁 뛰어와도 하나님은 오히려 기특하게 보시지만, 구약 시대라면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을 통하여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인간의 혼을 다스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 시대에는 육적인 것을 도외시해도 좋으냐하면,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 육 아울러 하나님 앞에 정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 교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허술한 옷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교회에 나와,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뒤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어른을 만나러 갈 때에는 깨끗이 세수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가서 그 분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가는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행자지(自行自止)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천사를 통하여 여러분의 동태를 살피고 계시는 것입니다.(슥1:12 참고)
우리가 신령한 것을 알아들으려면 신령한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설교를 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정통하여 설교할 때 유식한 말을 많이 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다시 말해서 주께서 주시는 것만 전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영적인 말씀 이외에는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줘도 시들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유명한 부흥사의 설교를 들어도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즉 더욱 깊은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런 신령한 이야기도 듣는 사람의 영적인 단계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릅니다. 즉 100%나 70% 혹은 50%쯤 받아들이는가 하면, 때로는 마이동풍 격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령한 말씀은 박사나 교수라 해도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반면에, 불학무식한 할머니도 은혜 안에 있으면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으면 직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조화입니다. 요컨대 움직이는 것은 영의 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반교회에서는 김 아무개 목사에게 은혜가 많다고 해서 신도들이 몰려갔다가, 몇 해 후에 은혜가 떨어지면 이번에는 은혜가 많다는 강 아무개 목사를 찾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은혜 많은 목사를 따라 철새처럼 왔다 갔다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성경에 예언된 인물인 이긴자는 여느 목사와는 다릅니다.
이긴자는 은혜가 있었다, 끊겼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이긴자가 나타나 신도가 만 명 모였는데, 은혜가 끊겼다고 합시다. 이 경우에 이들은 자동적으로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큰 타격을 안겨 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긴자는 자나 깨나 은혜 줄기가 끊겨서는 안 되며, 또 사실상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 세 천사란, 성전을 주관하는 천사와,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 그리고 인 치는 천사로,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계시록에 비교적 자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계3:5, 7:3, 8:4, 14:8 참조)
하나님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이긴자는, 이를테면, 인쇄에서 동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동판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에 걸친 연단이 필요했으나, 일단 동판이 만들어지면 비슷한 인쇄물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 종이가 희고 검은 차이는 있으나 인쇄물은 똑같습니다. 이 종이를 희게 탈색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면 구약 시대에도 천사가 그와 함께 활약했지만, 예언된 계시록의 주인공이 나타나면 천사들이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분야에서 각각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을 주관하는 천사는 성도들의 동태를 비롯하여 성전에 관련된 모든일을 돌아보고,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곧 예배를 살피며, 인 치는 천사는 주의 아내 될 자격을 갖춘 자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주께서 이긴자를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긴자를 주께서 택하여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소개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긴자는 실제로 주님의 택함을 입고 이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즉 주님은 이상 중에 이긴자를 데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서 인사를 시키며, 하나님은 이때 비로소 당신의 영적 맏며느리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소개가 끝나면, 이들 천사는 그 후부터 이긴자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을 같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책에 녹명되려면 이 세 천사의 손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에 하나님은 이렇게 세밀히 간섭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귀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 가운데서 벗어난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의 관심밖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몇 주일씩 철야하면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께서 언약대로 지상에 오셨을 때,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또 아무리 정성껏 제사를 드려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하기 위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큰 범죄가 되었습니다.
과거 2천 년 동안 기독교는 바울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이긴자가 나타나면 새로운 신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감추었던 말씀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계2:17)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펼쳐질 때 그 역사를 훼방하는 것도, 주님을 훼방한 것처럼, 하나님께 범죄가 됩니다. 그러나 이긴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던 것과는 달리, 그를 해치려는 원수를 소멸하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게 되어 있습니다.(계11:5) 주께서 불담으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