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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9.18본문
Part 01. 말씀의 향연
Chapter 07. 천당과 지옥 (1)
1) 영체의 대결
영의 세계는 지상의 세계와 판이하지만, 비슷한 면도 더러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겨루는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마귀와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세워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예컨대 14만 4천으로 헤아리는 하늘나라의 군병의 수가 차면 천년 세계가 펼쳐지고, 천 년이 차면 아마겟돈 전쟁을 거쳐 심판을 하게 되는 것도 이 섭리의 하나입니다.(계20:12-13) 천국과 지옥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편에 속한 사람은 천국에, 마귀의 편에서 움직인 사람은 섭리상 지옥 불에 던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는 죽어도 영은 살아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다만 그 영이 어느 쪽에 속하여,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이 말씀이 만일 일종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의미에 그치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주님은 도학자(道學者)―그것도 거짓말을 잘하는 도학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또 앞으로도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나 세례 요한의 등장이 그랬고, 오늘날 이긴자 감람나무의 출현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성경적인 인물로,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천지는 없어져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마24:35)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어떤 분은 사람이 죽으면 곧장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는 줄 알고 있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육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지성소가 아니면 음부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자, 즉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계20:4)들은 지성소에 가서 천년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계6:10 참조) 그렇지 못한 사람, 즉 하나님을 공경하여도 여전히 마귀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숫제 하나님을 외면하고 마귀의 편에서 움직인 사람들은 음부에 가서 심판 때까지 대기하게 되어 있습니다.(계20:13)
성경은 이에 대해 “내가 보니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계6: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영혼은 일단 지성소나 음부에서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국이나 지옥의 내용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옥의 경우는 ‘꺼지지 않는 불’(막9:43) 또는 ‘불 못’(계20:15)으로 표시되고, 그 이상 별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때가 되면 이긴자를 통해 그 내용을 터뜨리게 되어 있습니다.(계2:17, 단12:9)
성경에 기록된 ‘불못’이니 ‘불’이니, 하는 말씀은 하나의 비유로, 지옥에 떨어지면 영원히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죄과(罪過)의 내용에 따라 같은 불못이라도 실제로는 고통의 강도(强度)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의 고통 자체에 대해서는 일률적(一律的)으로 어떻다고 잘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재판을 하여 판결이 나기 전에는 죄수들이 유치장에서 대기하며, 일단 선고가 내려져 형이 확정되면 그때 비로소 교도소에 가서 일정한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 기간은 죄상에 따라 몇 달을 사는 사람에서부터 무기 징역, 나아가서는 아주 감옥에서 음부로 직행하는 사형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이들 죄인에게 형의 내용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미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부(유치장)에서 기다린 죄인들은 심판을 받은 다음에 형이 확정되고, 실제로 느끼는 형벌에 경중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 미리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천국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마귀가 발등상 된 후 심판을 거쳐서 비로소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이 베풀어지려면 아마겟돈 전쟁에서 마귀의 세력이 완전히 소탕되어야 하며, 이 아마겟돈 전쟁은 천년세계가 지나서 일어나게 되어 있고, 천년세계가 이루어지려면 일정한 여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 여건이란 바로 하나님의 군병, 14만 4천이 편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작업을 마무리 짓는 것이 곧 오늘날 우리의 이 역사입니다.
또한 마귀와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겨루어 온 것도 요컨대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이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겨룬다’는 것은 힘이 비등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어른과 어린이는 서로 겨루지 않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겨룹니다. 힘이 비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미국이 단연 우세하더라도 맞부딪치면 큰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작은 앞잡이 나라에 무기를 대어주어 겨루게 합니다. 하나님과 용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겨루지 않고 하나님은 인간을, 용은 짐승을 앞잡이로 내세워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오늘날 월남은 완전히 공산화되었습니다. 자유민이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구경만 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왜? 관할 구역이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마귀 편에 속한 자를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며,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은 마귀가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하나님과 마귀가 지켜야 하는 룰(규례)입니다. 그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을 지성소로, 마귀는 자기에게 속한 인간들을 음부로 데려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 비유를 들어 천국에 대해 윤곽을 암시하였습니다. 즉 먼저 와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나중에 와서 일을 적게 한 사람이나, 주인은 약속대로 일정한 품삯 한 데나리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일을 많이 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불평했습니다.
먼저 와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품삯을 똑같이 주니 그런 불공평할 데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나중 온 사람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은 내 뜻이다.”
이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주를 열심히 믿어 그 나라에 가기는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반드시 노력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모태에서부터 수십 년 동안 열심히 믿은 사람이나, 잠시 동안 믿은 사람이나, 구원받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리고 때를 잘 타고나면 한결 유리한 조건에서 큰 혜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도 죄를 온전히 씻을 길이 없어 죽은 후에 바로 주께서 저들을 위해 예비한 약속된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히11:13) 신약 시대에는 주의 피의 대가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하고,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한 주님이 나타나게 되자, 사람들은 주님 당대는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주께서 당신의 피로 인류에게 영생의 소망을 안겨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피 권세로 말미암아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리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빈손 들고 직접 주님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 제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피 권세는 성령의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감화 감동시켜 오랫동안 역사해 오다가, 오늘날 이긴자가 나타남으로써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보혜사 성령의 큰 은총이 베풀어져 순교하지 않고도 예비된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뜨내기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이 역사에 몇 번 참여했다가 세상을 떠나도 그 시체가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으로도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천국에 들어가도 세대에 따라 수고해야 할 여건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마치 품꾼들이 포도밭에 각자 6시와 9시와 11시에 나가 일한 분량은 다르지만, 주인이 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장차 가야할 ‘현 주소’를 분명히 알고 이 역사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도 고마운 줄 모르면 주께서 섭섭해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