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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5.23본문
Part 04. 좁은 문을 두드려라
Chapter 31. 순교에 대하여
기독교 역사를 보면 피비린내를 많이 풍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을 사자(獅子)의 밥이 되게 한 유명한 네로 황제의 대학살에서 우리나라 6.25때 교역자들에 대한 붉은 마수(魔手)의 무더기 처형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아니, 오늘 이 시간에도 저 공산 치하에서는 지하에서 몰래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지내는 많은 신도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후 근 2천 년 동안에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만에 이르는데, 이들을 다 순교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 순교자라면 주께서 재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14만 4천의 천군은 진작 차고 넘쳐 천년왕국이 벌써 이루어지고, 이어서 새 하늘나라가 임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순교자를 가리켜 ‘주를 위해 목 베임을 받은 자’(계20:4)라고 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주를 위한 겉사람의 형식적인 죽음이 아니라 속사람의 진실된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아무런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라야 비로소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세대에 몇 사람이 날까말까 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육을 가진 인간으로서 주를 위해 태연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설사 구원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권력, 재산, 이 모든 것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를 앙모하는 마음이 여간 뜨겁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믿음은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되며 결코 인간의 용기나 결심 같은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대체로 한동안 같이할 뿐,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령이 자기에게 충만히 임할 때 비로소 주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순교하려는 각오는 되어 있어도 죽음을 눈앞에 놓고 애착이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는 아직 성령을 충만하게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따라서 그 죽음은 거룩한 순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순교란 성령의 감화도 감화지만, 긴 시일을 두고 미리 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비란 심한 연단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며,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열의가 단단히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신앙 가운데 열심히 달리다가도 맥이 빠지거나 풀이 죽는 것은 은혜가 줄곧 같이하지 않기 때문이며, 아직 은혜를 충만히 받지 못했거나 희미하게 받은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인격을 자기 안에 모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를 자기 안에 모시려면 주께서 좌정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 ‘자기’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 주의 것이 되지 못하여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빳빳이 살아 있는 한 주님은 언제까지나 대문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 자랑거리가 없어져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자기’가 사라져 비어 있기 때문에 주께서 들어와 계실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의 인격을 소유할 때 두려운 것이 무엇이며, 부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부자’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죽이고 주의 피로 속사람이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먼저 ‘나’를 죽여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나’를 앞세우는 것은 아직 주님을 속에 모시지 못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총 가운데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마귀의 밥이 되기에 꼭 알맞습니다. 성령이 떠난 곳에는 대신 마귀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나 중심의 생활에서 주님 중심의 생활로’―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신앙 태도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살아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과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확실히 잡고 성령을 충만히 받았을 때, 비로소 순교, 즉 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