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3.08.31본문
Part 04. 좁은 문을 두드려라
Chapter 37. 은혜를 받으라
‘은혜’라는 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주일을 맞아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놀러 가는데 누구는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거나, 남들이 성경을 하나의 신화나 전설 또는 고전 문학을 읽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가는데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큰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기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쑥스러워 차마 못 부르는 주님을 자연스럽게 부르며, 남들이 횡설수설로 여기는 기도를 통해 주님을 가까이 대하여 엄숙한 한때를 갖는다면, 이것 역시 예삿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연약하여 이런 넓은 의미의 은혜만으로는 자기의 믿음을 키워 나가기에 어쩐지 미흡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령, 주께서 살아서 나를 가까이한다거나, 자기가 죽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좀 더 분명한 증거를 얻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를 갖게 됩니다. 즉 은혜의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한데 이런 갈증은 성경을 읽는다거나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예를 들어, 성령의 불을 받든가, 향취를 맡든가, 또는 생수나 이슬의 은혜를 접하든가, 혹은 이 모든 것을 다 체험할 때 비로소 주께서 자기와 같이한다는 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받아 은혜의 기갈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께서 이와 같이 자기를 가까이 하실진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죽어도 죽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고, 웬만한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앞으로 자기의 믿음을 보다 더 굳건히 다지기 위해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좁은 의미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마귀의 장난이냐를 가려야 합니다. 이건 어려울 것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역사는 성결하고 거룩하고 덕스럽지만, 마귀에게서 오는 악령의 역사는 불순하고 비천하고 부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가령 하나님과 교류한답시고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자빠져서 거품을 흘린다면 우리는 이런 신비의 체험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령과 악령의 역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은 내가 안찰을 해 보는 것입니다. 즉 내 손이 닿자마자 상대방의 악의 세력이 대항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제일 강하게 내립니다. 장소부터가 주님의 몸 된 성전이요, 또 많은 성도들이 모여 주님을 찬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집중하고 주의 십자가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박수를 한 번 쳐도 정성껏 쳐야 합니다. 또 찬송을 한 마디 불러도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불러야 합니다. 이 정도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은 얌체입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마음이 단순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많아 마음이 복잡하면 주의력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없으며, 생각이 곁길에 접어들어 은혜줄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른바 지식인들이 은혜 체험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가야 할 텐데, 이들은 흔히 이론을 앞세워 자연히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바울도 처음에 이 때문에 애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도 짐작이 갑니다.(갈6:14) 성령의 역사에서 인간의 것이 조금이라도 앞서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란 인간의 혼에 주님의 영이 담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공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언제나 영적인 교류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구태여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줄을 잡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혜를 오래 간직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지, 마귀에게 내주거나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끊긴 것은 마귀가 틈을 탔기 때문입니다.
이긴자란 바로 은혜가 끊이지 않고 늘 연결되어 있는 주의 종을 가리킵니다. 그가 있는 곳이 제단이 되며, 그 단상에서 성도들에게 은혜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애쓸 때보다 은혜 받기가 무척 쉽습니다. 귀한 섭리 속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것이 무엇인가? 내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았는가? 내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거기 반드시 먹물이 묻었거나 두드러기가 돋았거나, 어떤 흠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이런 사람은 1년 365일 신앙생활이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신앙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변동이 없이 일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되므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은혜는 노력의 대가일 수 없지만, 노력 없이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여러분은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건데…”사실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비하면 은혜는 너무나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게으른 사람을 외면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사도 시대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들이 불과 같은 성령을 받고 그것을 분명히 느낀 것처럼, 오늘날 예언된 인물을 통하여 내리는 이슬 같은, 혹은 비와 같은 성령의 은혜도 감각적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영적인 연결이 되어 있다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주께서 살아 역사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은 여러분은 누구나 이런 성령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중에는 아직도 이런 은혜의 연결을 받지 못하고 맨송맨송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딘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짧아서 구속하지 못하겠느냐?”(사50:2)고 우리에게 안타까이 호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도 우리가 거기 호응하지 않으면 주실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자세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은혜를 소나기처럼 쏟아 부어도 여러분의 그릇이 정하지 못하면 담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 또는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깨끗한 정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천국을 빼앗기 위해(마11:12)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약된 종을 내세워 은혜를 부어주는 역사 가운데 부름을 받았으므로 혜택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이 손길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거저 되는 줄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노력 없이 받은 은혜는 쏟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값없이 받는 것까지는 좋지만, 적어도 그 은혜를 오래 간직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은혜를 받기가 바쁘게 쏟아 버리면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로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받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은혜를 한번 쏟으면 마귀가 더욱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마12:45)
여러분은 방금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말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바친다’는 말은 제단에 연보를 많이 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모든 정성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찬송을 불러도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기도를 하려고 해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그만큼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찬송이나 기도는 백날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저분한 생각부터 물리쳐야 합니다. 억지로라도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께 간구하십시오. “이런 심정으로 어찌 주님을 부를 수 있사오리까? 사모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 십자가를 붙들게 해 주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또 잡생각이 침투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매달리십시오. 이렇게 두 달, 석 달 꾸준히 노력하노라면 반드시 은혜의 연결을 받게 됩니다.
나부터 먼저 살아야 합니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제단에는 30분쯤 미리 나와 준비 기도를 하고, 좀 극성을 부리십시오. 사생결단을 하고 매달리십시오! “저에게도 주님께서 살아 역사하는 증거를 주십시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어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주셔야 살겠사오니 주시옵소서!” 이렇게 눈물 뿌려 호소할 때, 반드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듯 열성을 내면 물론 마귀가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뜻하지 않는 시험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병마로, 손재(損財)로, 혹은 터무니없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과감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시련과 연단을 거쳐서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값진 것일수록 손에 넣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값진 보배인 은혜를 거저 받으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내가 오늘날 주의 종으로서 여러분의 앞에 서게 된 것도 하늘에서 무작정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슥4:6)고 하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계산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할 대로 다 시험하고, 저울에 달아보고, 자로 재어보신 후에 비로소 당신의 종으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남모르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남 못지않게 매달렸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눈물 뿌려 주를 사모하고, 어떤 역경에서도 주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전에 단을 지킬 때 세 사람을 놓고 설교하면서도 주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는 심정으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고, 교역자로서 하나님의 것을 10원 한 장 축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태도를 고치십시오. 집안에서 할 일은 하되,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육과 물질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는 저 이란의 선박왕 오나시스는 억만장자로,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도 아내로 삼고 한동안 흥청거렸으나, 그가 죽은 뒤에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유족들에게 재산 싸움을 붙인 것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돈을 올바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모든 일에 주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주님을 제쳐놓고 자기 맘대로 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행자지(自行自止)’라고 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다니십시오. 주와 멀어지면 욕심이 생기고, 범죄에 빠지게 됩니다.
죄란 무엇인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 즉 주를 멀리하는 것이 죄입니다.(롬14:23) 하나님은 형벌이나 축복을 당장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응보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주를 멀리하고 ‘내’가 고개를 들 때 교만이 생깁니다. 며칠 전에 주께서 이상 중에 여러분의 심령 상태를 보여주셨는데, 직분을 가진 사람들보다 숨어서 주께 기울이는 사람들이 더욱 앞서 있습니다. 직분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이 자리에 몇 명 모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몇 명이나 주 앞에 서느냐가 문제입니다. 알곡을 채우는 것이 주님으로부터 받은바 내 사명입니다. 나는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심정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알차게 해 나가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