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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1.15본문
Part 03. 이기는 그 날까지
Chapter 16. 여호와를 두렵게 섬기라! (모세의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일면만을 믿고 따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곧 자비하신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이 합당하게 움직일 때 자비하신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채찍을 가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이 잘 입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느9:28)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대하는 기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과 채찍을 가하시는 하나님, 이 양면을 잘 알고 섬겨야 합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를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채찍을 가하시는 것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이고, 그 아들이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로는 그 노가 풀렸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권한을 주님께 맡겨서 역사하시며, 구약 시대처럼 당신의 백성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때그때 노를 발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더디 노하시는 것뿐, 때가 되면 반드시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마련입니다.(계20:12)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큰 섭리가 베풀어질 때에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에 따라 그 역사를 좌우하게 되므로 그들에 대한 주의 움직임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역사와 방불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나눌 만큼 전무후무한 큰 종이었습니다. 그가 맡은 사명이 그만큼 크고 또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실패한 종으로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오늘은 여기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 우리의 거울로 삼으려고 합니다.
당시에 애굽에 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60만이며, 남녀노소를 합치면 약 150만이나 되는 인구가 동시에 피난길에 나선 것과 양상이 흡사한 것입니다. 그 행렬은 100리까지 뻗쳐 영도자 모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모세의 거처와 움직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질서와 기강을 바로잡는 영도자가 모세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 장막을 치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막을 치고 묵어가는 고장이 물 맑고 열매도 많을 때는 백성들이 잠자코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여 고생이 닥쳐오면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불평과 원망이 최고조에 이른 적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류하면서 율법을 받을 때이고, 또 하나는 신 광야의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는 주책을 부리고, 르비딤에서는 물이 없어 모세를 크게 원망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물이 있어야 목도 축이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 구경을 할 수 없는 곳에 장막을 치는 날에는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르비딤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선 목이 말라 견딜 수 없었으므로 대표 격인 장로들이 모세에게 항의했습니다.
즉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낸 것은 이렇게 목이 타서 죽게 만들기 위한 것이냐? 우리에게 물을 다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의 돌팔매를 맞고 죽을 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출17:3)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육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증거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가르고, 메추라기를 바람으로 모아서 고기도 먹여 주었습니다. 또 그들이 불평하는 원인이 된 물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신 광야에서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쓴 물을 달게 해서 마시게 한 적도 있었습니다.(출15:22-25)
또 그 날 아침에도 여호와께서 내려 주신 만나로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이런 저들이 모세에게 그렇게 윽박지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종을 보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는 소행입니다.
모세는 어이가 없어 하나님께 그대로 고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후에는 나를 돌로 치겠나이다.”(출17:4) 이런 기도가 하늘에 올라갔으니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호렙산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서 저들에게 마시게 하여 당신이 살아 계신 증거를 또 한 번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총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가운데 베푸신 것이 아니라 노하심 속에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결말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유목 민족인 아말렉이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이 침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선수를 쳐서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습니다.(출17:8) 모세는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내세워 아말렉 군사와 싸우게 하고, 자기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총지휘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잡은 손을 높이 쳐들면 이스라엘 군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 군이 이겨,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아래로 처지는 일이 없도록 돌을 쌓아 모세를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비로소 여호수아가 아말렉 군을 크게 무찔렀던 것입니다.(출17:11-14)
우리는 모세의 옛 행적에서 두 가지 중대한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간의 어려움이 닥쳤다고 해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종을 논평하거나 원망하면 하나님께 큰 범죄가 되며, 하나님의 역사에 막대한 지장을 일으켜 자멸의 길을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세에게 순종했던들, 저들은 금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모세를 원망하여 하나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맨 끝에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영도자에게 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정부에서 개각이 있었는데, 아랫사람이 잘못했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과 교통부 장관이 물러갔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영도력의 부족에 대한 책임을 물었습니다.
하긴 모세에게 잘못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가 미리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하시니 괴롭더라도 참으라고 잘 타일렀던들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최소한도로 축소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영적 가나안으로 가는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사소한 일로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다면 그 여파가 여러분 자신은 물론, 나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를 끌고 나가는 나는 물론 사전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없도록 단속할 것이며, 교역자나 직분을 맡은 분들은 아론과 훌이 모세가 피로하지 않도록 돌로 앉을 곳을 만들어 주고 두 손을 붙들어 올린 것처럼 내 손발이 되어 주어야 하고, 일반 성도들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주님께 충성하여 3자 일체가 되어 잘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자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이 따를 테지만, 이것을 딛고 넘어서 박차고 나갈 때 본인의 믿음은 자라고 하나님의 역사는 착착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 닥쳐도 주저앉아 이러쿵저러쿵하면 그의 공로는 와르르 무너져 본인 자신은 물론 이 역사 전체에 흙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는 이런 일이 절대로 없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