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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1.05본문
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17. 재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며, 또 그 때문에 큰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예언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예언들은 하나같이 적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예언의 말씀은 물론이고, 주께서 땅에 직접 와서 하신 말씀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행적(行績)에 관해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비롯해서 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빌려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앞으로 될 몇 가지만 제외하고는 그것이 다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성경적인 인물로서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성경 연구가들 사이에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마지막 운명하실 때의 말씀까지도 당신에 관해 미리 기록된 시편(시22:1)을 읊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일거일동이 성경에 예언된 말씀과 부합되지 않으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하신 예언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요2:19)는 말씀 그대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만나자.”(마26:32)는 말씀 그대로 갈릴리에 나타나셨으며,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요14:16)는 말씀도 그대로 이행하셨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주께서 부도(不渡)를 내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입니다. 즉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왕권(王權)을 갖고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마16:28)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예언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 당대는커녕, 장장 2천 년이 가깝도록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나중에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단서(但書)를 붙이기는 했으나, 부도는 부도
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주님은 이런 부도를 내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과 여러 교역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짓말을 했나? 아니면 잘못 기록됐나? 아무튼 재림에 관하여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어지라.”(마24:3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색하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불찰이었을까요? 그게 아닙니다. 주께서는 나중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사도 요한에게 이상 중에 ‘이긴자’가 나타나 당신이 다시 올 예비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계11:3-4)
주님은 ‘그 날과 그때’의 광경에 대해서는 대충 윤곽은 말씀해 주셨지만, 정확한 날짜는 보류해 두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날짜는 주님이 말씀하실 내용이 아니며, 어느 날 아무 시라고 잘라서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짜는 땅에서 여건이 마련되어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워져 십자가의 군대가 온전히 편성될 때, 그 날짜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땅의 움직임에 따라 그 날짜는 앞당겨질 수도 있고, 지체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그 군대의 수가 차면 주님은 오시지 말라고 해도 오시게 되어 있고, 그 수가 차지 못하면 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마귀가 발등상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즉 14만 4천의 하늘 군대가 다 편성되면 마귀의 세력을 발등상 시킬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 주께서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오셔서 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한 성경적인 절차대로 천년 왕국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세워 봤자 악의 세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짜를 하나님께서 내정(內定)하고 계시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정이지 확정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과 그때를 확정짓는 것도 땅에서 그 수가 찬 연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날짜는 땅에서 주의 피 권세로 그 수를 채우는 자, 곧 이긴자에게 가르쳐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계3:12 참조)
주님께서 “너희들 중에도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16:28)고 하신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여 말문이 막혔으나, 그렇다고 얼굴에 노골적으로 그런 기미를 나타낼 수 없어 마음속으로 은근히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엿새 후에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가까운 제자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마17:1)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좀 더 분명히 입증하기 위해, 우선 이들 앞에서 홀연히 변모하는 동시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비몽사몽 간에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 우리는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드리려고 합니다.”(마17:4) 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홀연히 광채가 나는 흰 옷을 입고 계신 주님과, 여기 곁들여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이런 초인적(超人的)인 주님으로부터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왜 하늘에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새삼스럽게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했을까요? 당시에 주님의 주위에 모인 사람은 물론, 제자(수제자 베드로를 포함해서)들까지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실상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한 일입니다. 그만큼 오래 때 묻은 우리의 고정관념(固定觀念) 또는 일반 통념(通念)을 바꾸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흐려 세상에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런 것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주님을 모세나 엘리야 정도의 대 선지자로 알았을 뿐, 이들 두 선지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머리에는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대 선지자의 이미지(인상)는 깊이 박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부터가 무척 생소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목수 노릇을 하던 사람을, 몇 가지 이적을 행했다고 해서 “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군요!”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를 남의 일로만 생각지 마십시오.
세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끝까지 따랐느냐?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운명하고 승천하신 연후에도 긴가민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것이 믿음입니다.
이윽고 주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까지는 너희가 본 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마17:9) 주님은 왜 이렇게 이들에게 함구령(緘口令)을 내렸을까요? 말로 하면 듣는 사람들이 곧이듣기는커녕 오히려 논란거리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육을 갖고 있는 인간 가운데는 선한 자가 있을 수 없고, 다 숯덩이 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주께서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19 :18)고 말하여, 하나님만 선하시고 당신도 육을 입고 있는 이상 선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암시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욥 4:18)라고 하였겠습니까? 모처럼 당신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 지으신 인간을 외면하시면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불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족한 대로 당신의 종을 통하여 역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사람의 인품을 구분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성인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성인이라고 우러러보는 이른바 인류의 스승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기는 여느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저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해?”하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지만, 흠 없는 인격자라야 주의 종이 된다면 엄밀히 따질 때 거룩한 단상에서 외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공경하고 증거하다 보면 자연히 마음도 맑아져서 선하게 되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의 피로 씻음을 받아 온전히 거듭날 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받을 때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은혜를 베풀 때’(고후6:2)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들어서 쓰십니다. 그러므로 그 죄만 보면 모처럼 일으킨 하나님의 큰 역사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도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 있는 성령의 큰 역사에 압도되어 따르다가, 나중에 와서 하나님의 사람의 인간적인 실수로 하나님의 역사 자체를 의심하는 사례가 없지 않는데, 이것은 물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데서 오는 본의 아닌 불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아직도 오시지 않는가? 오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시지 못합니다. 마귀를 발등상 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를 작살내는 마지막 작업이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에덴성회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큰 영광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여러분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