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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2.15본문
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19. 우리의 재산은 믿음이다 (2)
2) 영적인 부유함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사상적으로 구석구석 파보리만큼 파보고, 과학 문명이 크게 발달하여 성경도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규명하는 한편, 달나라를 거쳐 별나라에도 내왕하는 이른바 ‘우주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부 세계의 눈부신 발달과는 달리, 우리의 사고방식(思考方式)에는 구태의연한 일면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신앙 면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움직임에 대한 견해가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주님 당시에 모세나 엘리야 같은 대 선지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심이 대단했지만 주님은 거의 모두가 시골의 젊은 목수로 여긴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나 베드로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조건 고개를 숙이지만 막상 이긴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려고 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등을 돌리고 삿대질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께서 이긴자를 내세워 크게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계2:7 참조) 그런데 주의 가르침을 숭상하는 사람도 거의 이긴자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모세, 엘리야, 이사야 등등의 대 선지자들을 무척 우러러보지만, 당대에 이들의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바울을 천사처럼 받들기도 했으나(갈4 :14)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마태, 누가와 같은 인물들은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욱 우습게 보았습니다.
즉 베드로는 어부, 마태는 세무 서원, 누가는 의사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들을 믿음의 거인으로 존경합니다. 이런 경향은 오늘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에덴성회 식구들은 대체로 가난합니다. 주께서 왜 하필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셨는지 아십니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일종의 자기 합리화(自己 合理化)로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가 풍성한 가운데 쉽사리 척척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렇게 되면 당신의 백성들이 연단을 받지 못하고, 연단을 받지 못하면 십자가 군병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우리의 재산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본인의 주관적(主觀的)인 느낌입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설사 육적으로 가난하더라도 그것을 가난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흡족하게 생각하여 감사하게 됩니다. 가난을 느끼지 않는데 가난이 있을 수 없고, 흡족하게 여기는데 부유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말의 유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한편 믿음이 있으면 육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요삼1:2) 그러므로 주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 말라.”(마 6:25)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주께서 먹을 것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굶어 죽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주님이 가짜거나 믿음 자체가 가짜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영적으로 부유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육적으로도 궁하지 않습니다. 또 여기까지 이르러야 엄밀히 말해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일용할 양식도 얻고, 성전도 세우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성전 하나 짓더라도 주께서 참으로 당신의 몸으로 간주할진대, 없는 사람들끼리 호주머니를 털어서 세우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못살게 들볶는 하나님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모세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지시했을 때에는 당시의 여건을 감안하여 백성들이 지나친 짐을 지고 허덕이는 폐단이 없도록 했으며, 다윗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지시했을 때에도 당시의 처지를 참작했던 것입니다.
그 성전은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억 불에 해당되는 호화찬란한 건물이었으나, 이런 성전을 지을 마련은 다윗이 일국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이므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떠맡기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따를 수 있습니까? 앞뒤를 두루 살피시는 자상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일에 힘과 정성을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조만간 갚아 주시거나 길을 열어 주십니다.(말3:10, 빌4:19 참조)
3) 질그릇 속의 보석
세상은 완악할 대로 완악하여 깊은 진리일수록 외면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6천 년을 통틀어 우리의 역사만큼 어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무지무지하게 고생한 예레미야의 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하늘의 도를 가르쳐 하나님께 인도한 백성의 수는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인 120명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란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 후 베드로는 성령을 힘입어 한동안 크게 활약했지만, 그 뒤를 이어 하나님의 새로운 율법을 편 바울은 이만저만 고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에서 지난 3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를 뒤돌아보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목숨을 유지해 나갈 수 없고, 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명예와 권력 같은 것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전도까지도 돈이 상당히 힘을 쓰는 세상입니다. 돈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돈보다 더욱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인격(덕)입니다. 돈을 물 쓰듯 하는 사람도 인격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 인격을 능가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평가할 때 인격이 척도가 됩니다. 즉 옳고 그른 모든 논란이 이 인격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는 가치 척도가 ‘인격’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집니다. 즉 모든 판단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깊어지면 고결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의 은총입니다. 따라서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우리 에덴성회는 죄 씻는 곳이지, 사람의 인격을 자랑하는 데가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자는 다른 데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간 이영수를 보고 여기 나오신다면 실망이 앞설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석을 연상하십시오. 그 보석이 가치 있기 때문에 질그릇이 소중한 것이지, 질그릇이 가치 있기 때문에 보석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