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Part 03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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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29
[4권] Part 03 - Chapt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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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21. 인간을 보지 말라


인간은 극히 제한된 힘으로 한 세상을 살아야 하며, 생각이나 느낌, 말과 행실이 다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간을 보고 이 역사를 따랐다가는 결국 실망하기 쉽습니다. 아니 쉬울 정도가 아니라, 으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개 권사도 예배에 자주 빠지던데.”, “아무개 집사는 십일조 떼어먹어도 잘만 살더라.” 하는 식으로 뜨뜻미지근한 자기 믿음을 합리화(合理化)하는 것은 사람을 보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못미덥다는 데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자기를 남만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좀처럼 모르고 지나게 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대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곧잘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못 보느냐?”고 꾸짖은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저명한 인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일을 즐겁게 살려면 양복을 맞춰 입고, 한 달을 즐겁게 살려면 말을 사고, 1년을 즐겁게 살려면 집을 장만하고, 일생을 즐겁게 살려면 정직해야 한다.”

 

이것은 정직, 곧 인간의 덕을 강조한 것으로,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이 덕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즉 자기라는 인간 본위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이 덕은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가운데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덕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리를 판단할 때, 으레 양심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양심도 상당히 변덕이 심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양심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을 푯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것에 그치는 양심에 의지할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할 수 없게 됩니다. 양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선과 악의 개념(槪念)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또 악이겠습니까? 여기서도 우리는 주님 위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어떤 행위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합당치 못하냐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주님 본위로 생각하고, 느끼고, 보고, 듣고, 또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7:25) 이것은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답답함이 담긴 논평의 한 토막입니다. 너희가 왜 인간만 보고 하나님의 뜻은 헤아리지 못하느냐?” 하는 주님의 탄식 섞인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인간 이영수를 보려고 여기 모였습니까? 나를 보지 말고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쓰러진 것이 어디 베드로가 한 일입니까?(5:1-6 참조)

 

주의 종은 날이 갈수록 존재가 희미해지고 대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반대이면, 그러니까 점점 주님이 희미해지고 내가 드러나면 이건 큰일입니다. 인간 이영수는 사라져야 합니다. 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구약 66권에 기라성처럼 등장한 많은 선지자들의 인품을 보십시오. 성경은 여느 경전들과 달리 이들의 약점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도학자(道學者)나 식자(識者)들의 빈축을 사기도 합니다. 이들이 모처럼 교회 문을 두드렸다가 떨어져 나가는 원인이 주로 이런 데 있는 것입니다.

 

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결코 도덕적으로 숭배할 만한 인물이 못되며, 위대한 모세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밖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을 통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러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 약점과 결함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요컨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덕성(德性)이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아니 덕성이 모자라는 것 자체가 그다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인간은 다 죄의 무거운 멍에에 짓눌려 있는 새까만 숯덩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씻기 위해 주께서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믿음이 독실하다고 해서 택함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세대의 여러 가지 여건에 따라 가장 적임자라고 인정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귀족 출신이요, 잘생기고 머리가 좋아(1: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지혜로 눌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친구들을 지방 장관으로 삼아 자기 기반을 닦고(2:49)총리로서 이들을 손발로 부려 치리에 만전을 기했던 것입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그가 남달리 기력이 장사여서 블레셋 군을 쳐부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고, 주께서 박식하고 박력 있는 반역자 바울을 크게 들어 쓰신 것은 그가 이방인에게 새로운 하늘의 도를 전하는데 적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보면 그 세대의 특징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을 입고 있는 이상 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 때문에 시험에 떨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에까지 세상 모럴(도덕)을 앞세우는 데서 오는 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경우에는 손해를 보는 것은 떨어지는 장본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겠지만, 양떼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사실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아무튼 사람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우리들의 상식이 되어 있지만, 여러분이 곧잘 말려드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가롯 유다가 떨어진 것도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인간 예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나쁜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그 후 주의 역사에는 크고 작은 무수한 가롯 유다가 나타났습니다. 누가 되고 싶어 하필 가롯 유다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장담은 못합니다. 베드로도 한때 작은 가롯 유다였으니까요.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님을 부인하였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미처 몰랐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언제나 자기반성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