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Part 03 - Chapter 22

페이지 정보

DATE. 2023.03.29
[4권] Part 03 - Chapter 22

본문

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22. 믿음과 행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어느 한 구절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총체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외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예컨대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하루 24시간 내내 기도로 세월을 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도 없지만,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답시고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목구멍에 거미줄을 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엄숙하고 순수한 심정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뭐니 뭐니 해도 주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릴 때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런 심정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결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여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의 주인이신 주께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성전세를 지불한 이야기가 있는데,(17:24-27) 우리는 이런 데서도 주님의 융통성 있는 일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불필요하게 남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싫어 이렇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할례 폐지론을 들고 나온 바울이 편의상 디모데에게 할례를 몸소 실시한 것과도 맥이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16:3)

 

또한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뜻을 나타낸 대목도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믿음과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놓고 볼 때, 어느 한 구절만 강조하면 본의 아닌 오해를 하기에 꼭 알맞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2:8-10) 이 말씀은 구원관의 본질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행실이 착해서가 아니라 믿음에서 비롯되며, 이 믿음은 하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선하면 얼마나 선하겠습니까?

 

인간의 행위는 거의 다 타고난 성격과 주어진 환경 교육 수준, 생활 정도, 이해관계 등등 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보면, 설사 어떤 사람이 선한 행위를 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개입될 구석은 극히 적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행실이 착해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 막말로 행위는 망나니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물론 아닙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26) 그럼 이 말씀과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 믿음과 행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행위가 다듬어지고, 행위가 다듬어지면 믿음이 자라게 마련입니다.

 

성경에는 혈루증으로 12년 동안이나 고생하던 여자가 주님의 겉옷 자락을 만져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자가 당신의 옷자락을 덥석 잡는 것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8:46)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면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예수의 겉옷만 만져도 이 병이 나을 텐데하고 그 기회를 잔뜩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갸륵한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주님의 뒤를 밟아 급기야 주님의 겉옷 자락을 잡게 했던 것입니다.

 

여자가 생면부지인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는 것은 실례의 정도가 아니라 망측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잊어버리고 이처럼 대담하게 나왔던 것입니다. 즉 그 믿음에 그 행위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우선 이런 극성이 따라야 합니다.

 

이런 행위가 앞설 때 다름 아닌 정한 그릇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음식을 담으려면 그릇부터 먼저 깨끗이 씻어 놓아야 합니다. 이 그릇을 닦는 작업이 곧 행위입니다. 주님은 새 부대에 새 술을 붓는다.”(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새 술은 새 부대에담을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 새 부대와 새 술을 만드는 공장이 바로 에덴성회입니다. 내가 여기서 믿음과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그것이 이를테면 이 공장을 제대로 가동시키는 기름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믿음이며, 행위는 믿음을 북돋아 주는 구실을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일종의 주종 관계(主從 關係)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믿음에 의해 구원에 이르고, 행위로 말미암아 공로가 생겨 응분의 보상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의 서열도 이 공로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는다.”(24: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역사에 동참하게 된 여러분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얼마나 게을리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과부의 엽전 한 닢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입니다. 주님 앞에는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일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이것에 의해 그 사람의 공로가 평가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일만 충실히 하면 됩니다.

 

마리아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의 일을 뒤에서 많이 도왔습니다. 어느 날 주님이 마리아의 집에 들러 식사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맞아 부엌에 나가 식사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한데, 마리아는 한가히 주님과 마주앉아 노닥거리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마르다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샘이 났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쟤는 제 언니를 거들 생각은 않고, 이야기에만 신이 나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이리 좀 보내 주세요.”

주님에게 이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처지라면 당시에 주께서 얼마나 이들을 아껴 주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야, 그렇게 여러 군데 신경을 쓰지 말고, 네 일이나 해라.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여기서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할 일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마르다는 음식 대접을 하는 데 주력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이 역사의 뒷바라지에 힘쓰라는 뜻을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하는 일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그릇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두 사람 다 자기 분야에 100% 충성을 다했다면 물론 마리아의 공로가 더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자기 일에 70%만 충실하고, 마르다가 100% 충실했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마르다를 더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공로를 평가하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냐, 행위냐? 구원이 믿음에서 시작되느냐, 행위에서 비롯되느냐,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전자는 은혜를 앞세우고 후자는 도덕을 강조하지만, 어느 한쪽에만 역점(力點)을 둘 수는 없습니다. 양자는 긴밀한 함수 관계(函數關係)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키(열쇠)는 역시 전자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라.”(7:16)는 주님의 말씀대로, 덕스럽지 못한 좋은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좋은 믿음은 좋은 행위가 따르며, 그 행위는 아름답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