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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29본문
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23. 생명의 불로초(不老草)
세상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상가니, 도학자니 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진리의 근처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정작 진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핵심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 짜낼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진리는 체득해야 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 자신이 진리인 것입니다.(요14:6) 이렇게 말하면 또 이성(理性)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예수가 진리라니?’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곧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면 진리를 운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독단도 무엇도 아닌 사실입니다. 예수를 알아야 올바른 우주관과 세계관, 역사관 나아가서는 사생관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죽어도 죽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찾으려고 애쓴 불로초(不老草)는 예수가 갖고 계십니다. 적어도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진시황은 자기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부하를 시켜 오랜 시일에 걸쳐 막대한 돈을 뿌려가면서 이 ‘불로초’를 찾아내려고 무척 애썼으나 허사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구는 인간이 늙지 않고 무한정 살 수 있는 곳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세계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육이 아니라 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덩이 위에는 진시황이 찾은 그런 영약(靈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영적인 ‘불로초’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무참히 당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바울을 비롯해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자리에서 각자 자기의 믿음을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믿음은 역시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이 귀한 ‘불로초’를 손에 넣기 위해 과연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마치 사과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사과가 떨어져 입속에 굴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게으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염치없는 분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나야 뭐 주께서 다 깨끗이 씻어 주시겠지, 혹은 이긴자가 알아서 이끌어 주시겠지, 하고 주의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분들이 꽤 보입니다.
이러한 신앙 자세는 주체성(主體性)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우리가 타개해야 할 노예 근성과도 선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주님을 섬긴다는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시 바삐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59:1-2)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주시는 데 제약을 받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제약이란 곧 우리의 ‘죄악’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도움을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마귀의 편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하나님의 역사에 제동(制動)을 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19:9) 이것은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에게 쫓겨 굴 속에 피신했을 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가 곁길로 갈 때 언제나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아무개가 게으름을 피워 제단에 나오지 않고 대청마루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은 “이 아무개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며, 박 아무개가 심방을 가지 않고 장 보러 갈 때, 하나님은 “박 아무개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담길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간직할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며, 이것은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힘써야 할 분야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집안에 가만히 앉아 생명의 불로초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선물인 믿음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명의 불로초는 얼마면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값으로 따지기에는 너무나 비싼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라고 따질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몸뚱이를 다 묶어 바쳐도 살 수 없습니다. 아니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불로초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에게 시간을 얼마나 바쳤습니까? 할 일 다 하고 나서 나머지 시간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얼마나 했습니까?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그런 기도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끊기면 여러분은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십일조를 떼어먹은 일이 없습니까? 또 자기가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데서 동냥 주듯 몇 푼 명색이나 유지하기 위해, 그것도 인색한 마음에서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동냥을 바랄만큼 가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제일주의(第一主義)로 살아야 합니다.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주의 ‘은혜의 사슬’에 매인 사람의 신앙생활이며, 주 안에서의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얼마나 주님 제일주의로 살고 있습니까? 주님 제일주의가 아니라, 자기 제일주의로 살지 않습니까? 하루 24시간의 여러분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가 거의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아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청산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