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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29본문
Part 03. 은혜의 동산
Chapter 25. 우리는 주께서 다스리신다
1) 순종하라
내가 주의 지시에 따라 이 단상에 서서 여러분에게 외쳐온 지도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나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께서 가르쳐 주시고 들려주신 말씀을 꾸준히 전하였으며, 주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부어 주는 은총을 베풀어 왔습니다.
때로는 이단이라는 욕을 먹고 도깨비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내가 할 일만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그 말씀을 듣고 그 은혜를 받기 위해 두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면서까지 머나먼 이곳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 그 무슨 동화 같은 소리냐고 말입니다. 하긴 영의 세계에는 동화와 같은 일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파에서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을 입어서 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머리로 적당히 가감을 하여 일체의 신비(神秘)를 배격합니다. 그리하여 계시 운운하면 곧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오는 폐단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행2:17-19)라고 했습니다.
또 그때에 이긴자를 내세워 성령의 큰 역사가 베풀어질 것을 사도 요한을 통하여 예고했습니다.(계2:7) 그러므로 말세는 사도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이긴자가 나타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역사할 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종과 성령으로 교류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계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은 지식이 발달되어 달나라에도 내왕하는 때이므로 주의 종에 대한 지시 내용이 다를 뿐, 방법은 같습니다. 나는 이상 중에 받은 주님의 지시 내용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으며, 그 가운데서 여러분에게 당장 알릴 필요가 있고 또 여러분이 납득할 만한 것은 간간이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 기록에 의해 이 역사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 이영수가 어떻게 그렇게 성경에 밝을 수 있으며, 무슨 수로 그런 희한한 권능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듣는 귀와 보는 안목도 상당히 달라졌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시며, 어떤 방법으로 뜻을 이루시게 된다는 것도 대충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은 여러분이 믿음을 반석 위에 세워 십자가의 군병이 되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입니다. 즉 여러분은 우선 말씀으로 튼튼히 무장하여 이 역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여러분을 씻어 세우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사의 산 증인이므로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첫째 사명입니다.
이 역사는 하늘의 지시에 따라 땅에서 나와 여러분이 합작해서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귀가 아프도록 말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영의 문제는 내게 맡기고 따라만 오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내가 책임집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와 음란죄, 그리고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는 이 세 가지 죄만 짓지 않으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말이 많고 행동이 바르지 않은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것이 생명길인 줄 알만큼 안다면 묵묵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자기를 살리고, 이 역사에 보탬이 되는 올바른 신앙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나 같은 거야’ 하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여호와의 ‘일곱 눈’이 여러분을 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남달리 착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베푸시는 이 은혜 가운데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영의 목욕탕
여러분, 그 동안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나 받은 축복이 누구의 것입니까?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이제 와서는 싱겁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이 역사는 주께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여러분을 주님에게 중매하는 거간(居間)의 노릇을 할 뿐입니다. 주님은 나를 내세워 당신의 아내감들을 물색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후보자들이므로 흰 세마포로 예쁘게 단장하여 주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마포는 죄로 새까맣게 된 몸에는 입힐 수 없습니다. 입혀 봤자 쉬 더러워지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죄의 때를 벗기 위해 공동 목욕탕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공동 목욕탕이 말하자면 에덴성회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배인 죄의 때는 주의 피로 씻게 되어 있는데, 혼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여건이 너무나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당신의 아내감을 일시에 물색하려면 최고급 비누로 몸에 배인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나서 세마포를 입혀 줘야 합니다. 이 비누가 곧 오늘 이곳에 내리는 보혜사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 일은 땅에서 주님이 당신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 심부름꾼이 바로 ‘이긴자’입니다. 지금은 이긴자가 영의 목욕탕을 개업한 때입니다. 이 땅에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큰 은총이 베풀어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이긴자이며, 무엇 때문에 내세운 이긴자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없으면 이긴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긴자가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백성을 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 밖에 난 지가 오래입니다. 저들은 아직도 십자가에서 산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여전히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촛대는 벌써 열매 맺는 백성들에게 옮겨진 것입니다.(마21:43) 그것은 우리의 이 역사를 주께서 일일이 간섭하고 계시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직접 관여하는 역사의 울타리속에 들어왔다는 것은 영광스럽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에스겔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자 그 형제들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 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 알리라.”(겔33:30-33)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하나의 경종(警鐘)이 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도 그때뿐, 곧 한쪽 귀로 흘려버리거나 심지어 뒤에서 말썽이나 부리고 앉아 있다면 이 역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에스겔 당시의 백성들처럼 내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고’있다가 내 말이 그대로 응해지면 그때 가서야 ‘그분의 한 말이 옳았구나!’ 하고 후회할 겁니까?
나는 결코 허황된 말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하나하나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하는 데 달린 것입니다.
지금 4, 5백 명이 앉아 예배를 보고 계시지만, 주님은 장차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 당신과 함께 마귀와 싸울 만한 그릇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을 뿐, 그 밖의 사람은 안중에 없습니다. 지금 이곳이 은혜로 충만하여 이슬이 아니라 소낙비를 내려 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 각자가 변하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못 받는 것은 여러분의 할 탓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에게 곱게 보이면 그만큼 은혜가 강하게 내릴 것이고, 밉게 보이면 또 그만큼 은혜줄이 메마르게 마련입니다. 하늘에서는 조급하거나 답답할 것 없습니다. 왜? 여러분이 아니라도 백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외면하면 손해를 보는 것은 여러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슥7:12) 이것은 여호와께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곁길로 가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크게 노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이 역사에 동참한 분들은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이 땅에서 베풀어진 큰 성령의 역사가 육으로 기울어졌으므로 “무너진 데를 수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3년 전에 처음 이 단에 섰을 때 나는 여호와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귀한 피를 모독하여 짓밟아 버린 것에 크게 노하고 계셨으며, 그 노여움은 아직도 온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주님의 노를 온전히 풀어 드릴 수 있을까요?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뜻하였나니,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슥8:15-17) 요컨대, 믿음의 형제끼리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화목하지 않으면 그때는 여호와께서 노여움을 더하게 됩니다. 다음에 어떤 결과가 오리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 믿음의 형제끼리 미워하면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기독교의 대강령이고 보면 형제를 사랑하기는커녕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기도해도 헛수고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믿음의 형제끼리 무슨 원수가 된다고 티격태격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남보다 선하면 얼마나 선하고, 상대가 악하면 또 얼마나 악하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실 때에는 다 죄로 물든 새까만 숯덩이들입니다.
그러므로 행여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만 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십시오. 우리가 너나없이 죄 덩어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 남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사랑이 덮어놓고 상대방을 곱다 곱다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이와는 정반대로 서릿발처럼 매서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욕질을 하거나 술 취하거나 강탈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 교인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5:11-12)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그늘에서 독버섯이 자라는 것을 더러 목격합니다. 이른바 ‘쓴 뿌리’가 그것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즉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상종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쓴 뿌리’를 악신에게 내주는 권한도 보유하고, 정 눈에 거슬리면 이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고전5:5)
교인들과 고락을 같이 할 정도가 아니라, 자비량까지 하면서 낙은 먼저 교인에게 돌리고 괴로움은 스스로 사서 짊어져, 뭇 신도들이 주님처럼 받든(갈4:14) 바울에게도 이런 ‘쓴 뿌리’가 있었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3) 주의 종을 도우라
여러분과 나는 같은 배에 탄 한 식구입니다. 콜럼버스가 배를 타고 서쪽으로 지루한 항해를 꾸준히 계속하던 끝에 드디어 미국이라는 큰 땅덩어리를 발견하기에 이르기까지 그와 선원들 사이에 여러 차례 옥신각신이 있었으며, 심지어 저들은 하도 지쳐 콜럼버스를 해치려고까지 한 적이 있었지만, 콜럼버스의 용기와 끈기로 드디어 목적지까지 도달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큰일을 하려면 이렇게 어렵거늘, 하물며 마귀에게 도전하는 영의 싸움이야 더 말해 뭘 하겠습니까?
여러분, 날 도와주십시오. 세상에 독불장군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 재산이자 내 자랑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자기가 사도 된 것은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9:2)
“이 백성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삼하24:3) 이것은 다윗 왕이 교만하여 인구 조사를 해서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나가려고 했을 때, 간한 충신 군대장관 요압의 말입니다. 실로 가상한 충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상대가 유덕(有德)한 다윗이니 망정이지, 만일 옹졸한 여느 임금 같으면 무엄하다고 해서 목을 베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까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윗은 이 갸륵한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여호와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으며, 7만 명의 생주검이 생겼던 것입니다.(삼하24:15) 설사 다윗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백성들보다 자기가 기름을 부어 세운 다윗의 편을 들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하나님의 기본 태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눈에는 부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히 가타부타 말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겠습니까?(사29:16) 이것이 휴머니즘과는 다른 하늘의 가르침이 지닌바 특이한 일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도덕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들거나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처첩을 천 명씩이나 거느리는 것을 묵인했을까, 하고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당신의 지시대로 성전을 짓는 사명만 다하면 다른 모든 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덕스러우냐, 그렇지 못 하냐, 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그 한도 안에서 마음대로 행한 솔로몬의 행위를 우리가 탓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은 목동으로 있던 다윗과는 달리 어엿한 왕자였으므로, 그 정도의 축복을 하지 않으면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역대에 없는 부귀와 영화를 허용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나 역시 육적으로도 받은 축복의 언약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원치 않으며, 또 그럴 처지도 못됩니다. 내가 맡은 사명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어깨도 무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간의 범죄로 여호수아의 군대가 적에게 밀려났을 때 여호수아가 아간을 돌로 쳐 죽이고 나서야 여호와의 화가 풀렸던 것입니다.(수7:25) 하나님의 역사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이 역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