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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5.16본문
Part 04. 좁은 문을 두드려라
Chapter 27.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기본 방침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당신의 종을 통해 전한 말씀에 순종하는 정도와 또 회개 여부에 따라 내리는 축복과 책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나 오늘날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저 탕아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대인 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돈을 탕진하고 거지꼴로 집에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 것도 아들의 뉘우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때 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하인으로 써 달라고까지 간청했으니 망정이지,(눅15:20) 그렇지 않고 그냥 뻔뻔스럽게 돌아와 다시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려고 했다면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당장 내쫓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만, 용서하고 복을 내리실 때에는 언제나 그럴 만한 조건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다름 아닌 당신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그만큼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고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해 놓고도, 이 시험에 합격하면 약속을 지키고, 합격하지 못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브라함을 믿을 수 없으셨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종들도 믿음직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욥4:18) 마귀가 극성을 떨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역대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저 기독교 사상 기라성 같은 모세, 다윗, 세례 요한도 제 구실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먼 옛날 이야기를 꺼낼 것 없이, 이런 사례(事例)는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한번 단에서 외치면 은혜와 감동에 젖어서 금가락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치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마귀가 얼마나 크게 도전을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끝까지 너그럽게 대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주의 피를 모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문책하게 마련입니다. “네가 그 모양이니까 너를 따르는 백성들도 그꼴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그야 물론 당신의 종과 백성들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경우에는 불가불 종의 편을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방 여인을 취했다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일단 모세의 편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모세를 끝까지 옹호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권능으로 말하면 구약 시대에 모세보다도 더 큰 이적을 행한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가 행한 가장 큰 권능은 홍해를 가른 이적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저 태양의 운행, 그러니까 지구 자체의 운행을 멈추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모두가 하나님께서 두 선지자를 통하여 권능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모세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자주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어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똑똑히 알게 했으나 저들은 그때뿐,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면 모세는 하나님께 고하여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저들의 목을 축여 주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투정을 하면 또 모세는 하나님께 고하여 메추라기 고기를 먹여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경우에 모세는 하나님께 “이 백성이 이러니 어떡합니까? 보살펴 주옵소서.”하고 고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强暴)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奸惡)을 보게 하시며, 패역(悖逆)을 보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합1:1-3) 하박국은 작은 선지자였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과 교류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고한 말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움직임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류는 중단되고 맙니다. 하박국이 자기의 간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이 있을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얼마 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고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2-3) 여기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은 글씨를 크게 써서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에게 그 묵시가 반드시 이루어질 터이니 조급히 서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 말을 반신반의하고, 뒤에 앉아 인간의 생각으로 왈가왈부하면서 각자 자기 나름의 판단을 하고, 남의 험담이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보나마나 뻔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하늘로부터 이렇다 할 책망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자고로 ‘쓴 뿌리’가 으레 훼방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떻게 그 마수에 걸려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로부터의 간섭이나 아래에서의 풍파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역사할 때의 일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교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다른 때에는 비교적 평온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약하여 크게 대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흡족한 은혜도 체험하지 못하지만, 예수 믿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하긴 그들도 자기 나름으로 흡족한 은혜를 알고 예수 믿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민14:35) 그만큼 저들은 하나님의 눈 밖에 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이 자꾸 지연되다가 저들은 끝내는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과 마귀가 인간의 육을 사이에 두고 겨루는 구약시대의 이야기로,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만, 그 행동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말을 우습게 여기면서, 하나님께 이러저러한 은혜를 주십시오, 해봤자 “오냐, 여기 있다. 갖고 가라.” 이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가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줄 아십니까? 하늘에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아셔야 합니다. 우리 에덴성회는 여느 교회와는 달리 주께서 일일이 간섭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