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3.09.01본문
Part 01. 말씀의 향연
Chapter 03.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구약 시대부터 있어온 두 종파로, 여러가지 면에서 견해를 달리했을 뿐더러 서로 시기와 반목을 일삼아 왔습니다. 즉 사두개파는 귀족적인 반면에 바리새파는 평민적이고, 전자는 정치적이고 후자는 종교적이며, 전자는 부활을 부인하고 후자는 부활을 인정하였습니다.(행23:8)
그런데 ‘부활’이라는 말은 주님이 비로소 입 밖에 내었으며,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부활에 대한 깊은 이치를 잘 몰랐습니다. 다만 다윗이 자기가 죽으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음부에 버림받지 않기를 원한다는 정도의 의사를 밝히는 데 그쳤습니다.(시16:10)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설사 인정했다손 치더라도, 영혼 불멸과 관련시켜 희미한 의식(意識)을 가졌을 뿐, 그 영적인 의미는 몰랐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이 두 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각 주님과 성경 토론을 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파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사두개파였습니다. 주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부활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
요컨대 기독교의 핵심은 이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에서 부활의 교리를 빼면 한갓 사랑의 종교, 즉 모럴(도덕)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니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과 주님은 그야말로 앙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부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저들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을뿐더러, 반대파인 사두개인들의 주장과 정면으로 대립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두 파가 주님의 가르침 때문에 반목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사두개파는 정치적으로 득세하기 위해 바리새파와 때때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이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주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질문 공세를 펴기로 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형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잇도록 되어있는데, 만일 일곱 형제가 차례로 자식 없이 죽었을 때, 부활하면 이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마22:23-28)
이들은 주님이 주장하신 부활을 이 세상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 경우에 주께서 “그 여자는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다.”고 대답하면 천국보다 더 더러운 곳은 있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아무도 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잔뜩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부활할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저들의 육적인 질문에 대해, 주님은 영적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요. 주님은 말씀을 계속했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을 성경에서 읽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죽어서 아주 없어졌다면 어떻게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죽어도 죽지 않고 부활해서 살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망신시키려던 저들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망신을 톡톡히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동생이 청상과부가 된 형수와 강제로 결혼하도록 율법으로 묶어 놓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혈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얼마나 선민들의 혈통을 중요시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이 혈통의 보존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는 호적상 죽은 형의 아들이 되고, 둘째 아들을 낳으면 그때 비로소 그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호적에 올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동생이 아들 하나만 낳았다면 자기 후사는 적어도 호적상 끊기게 마련입니다.
만일 동생이 형수가 늙었다거나 얼굴이 미워 결혼하기를 꺼린다면 형수는 마을의 장로들 앞에서 이 사실을 공개하여 시동생의 얼굴에 침을 뱉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수가 청상과부가 되는 날에는 꼼짝 못하고 동생은 형수의 남편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망신을 당한 다음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주님을 떠보았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서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마22:36) 이것은 물론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에 해답이 나와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별로 배우지 못한 주님의 실력을 떠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들었습니다. 저들은 속으로 ‘제법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덤비는 수작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
“아, 그야 다윗의 자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들은 성경(구약)에 정통하여, 이런 질문쯤에 대답이 막힐 리가 만무합니다. 주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주님이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마22:45)
주님은 영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영의 세계를 잘 모르는 저들은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역시 사두개인과 마찬가지로 창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불학무식한 줄로 알았던 주님은 유식한 저들의 선생님이 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모두가 성령의 조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은 물론이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셨습니다. 아니 우주의 창업에 여호와와 함께 동참하신 주님이십니다.(창1:26) 다시 말해서 주님은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보다도 더 어른이십니다.
그런 분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지구의 한 모퉁이에 오실 때 다윗의 자손의 옷(육신)을 잠시 빌어 입었다가, 다시 하늘에 오르실 때 그 옷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우주를 지으신 주님을 상기해 보십시오. 해답이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주님의 영적인 질문에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손을 들고 말았을까요? 이들은 율법주의자로 영의 문제를 깊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의 세계는 율법으로 아무리 따져 봐야 알 수 없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처형한 원인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눈에는 주님의 놀라운 이적과 기사쯤은 모세의 전례도 있고 해서 이해가 갔는데, 말씀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부터가 비위에 맞지 않았습니다. “나를 믿으라.”, “나를 거쳐야 하나님에게 갈 수 있다.”, “내 피를 마셔라.” 등, 그밖에 말씀 하나하나가 다 귀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깊은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주의 은혜 가운데 젖어들어야 합니다. 율법은 은혜에 도달하기 위한 다리의 역학을 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다리’를 ‘몽학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갈3:24) 일단 은혜에 접하게 되면 율법은 은혜 아래 속하게 됩니다.
성경은 크게 율법과 은혜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자는 긴밀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차원(次元)이 다릅니다. 율법을 거치지 않으면 은혜에 이르지 못하지만, 일단 은혜에 접하면 율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새로운 율법, 곧 자유의 율법 아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언동을 취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하나님의 눈 밖에 난다면? ― 그러나 그를 구속할 율법(모세)은 없으므로 당장에 어떤 제재를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죄를 지으면 은혜가 떠나고 율법 아래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 아래있게 되는 것입니다.(갈 3:10) 이것은 은혜를 받았다가 놓쳐 버리고 다시 은혜를 받아본 사람들이면 경험을 통하여 잘 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