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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9.18본문
Part 01. 말씀의 향연
Chapter 05. 끝까지 이기라
여러분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즉 ‘주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우매했을까?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렇게 주책을 부렸을까? 나 같으면 안그럴 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 대하여 모르기로 말하면 그들이나 여러분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중에는 서운히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문제에 대하여 안다고 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로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세계에 대하여 배워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머리로 아는 것도 소중하지만, 하나의 지식으로 머물러 있는 데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앎이 실천에 이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 태도는 흔들리기 쉽고, 언제나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알게 되면, 즉 그 앎이 몸에 배이면 쉽게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참 앎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3년 동안 이 단상을 통하여 주께서 주시는 깊은 말씀을 듣고 감탄도 하고, 또 배우기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는 것이 얼마나 골수에 박혀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있는가, 한 번 반성해 보십시오. 그러면 각자 자기가 아는 것이 앞에서 말한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성경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머릿속으로만 ‘그렇구나!’ 하고 알고 있을 뿐,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 만날 그 타령이라면 말씀에 의해 은혜를 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알자는 것입니까? 마음을 새로 갖고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썩히는 앎이라면 아나마나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5:4)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애통’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즉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선 가슴으로 분명히 알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입술로만 주님을 찾기 쉬운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찬송 자체가 하나의 전쟁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실제로 마귀가 여러 모로 우리에게도 전해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칫하면 생각은 고스란히 마귀에게 내어주고, 건성으로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 말이 틀렸나. 나도 여러분과 같은 과정을 다 거쳐 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곡조를 합해 찬송을 불러도 하늘에 상달되는 찬송은 따로 있습니다.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가 하나님에게 올릴 만한 찬송만 일일이 골라서 바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계8:3 참조)
찬송은 하늘의 것을 우리가 받고, 우리 것을 하늘에 올리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를 때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즉 마음이 텅 비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마음이 가난하다.”(마5:3)고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미움, 교만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찬송은 주님과 연결되지 못합니다.
성경 잘 알고, 연조가 깊고, 헌금 많이 하고…, 이것으로 되는 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찬송이나 기도가 주님께 상달되어 은혜가 연결되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한 번 불러도 진실된 마음에서 간절히 부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가지 않습니다. 뼈저린 노력 없이 은혜 받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하고 주님 ― 이렇게 단출하다면 문제가 간단합니다. 그게 아니고, 나하고 주님 사이를 한사코 가로막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격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은혜줄을 놓쳐 버립니다. 그러니 인내와 열성 없이는 이 길을 가지 못합니다. 연단에 연단을 거듭하여 이기고 또 이겨야만 겨우 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마귀와의 3차 전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나가 싸우는 하늘의 군대에 뽑히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 이런 군병은 한 세대에 몇 사람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큰 은총을 내려 그 군대를 단시일에 많이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큰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아도 하늘의 군대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흰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있는 역사에 몸담았다 하더라도 결코 여러분 자신의 매달림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런 위치에 있게 된 것은, 물론 주의 은혜이기는 하지만, 피나는 노력의 대가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적당히 교회 문을 드나들어서는 겨우 구원이나 얻는 혜택을 받을 뿐,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 군병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기분이 내키는 대로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분이 좋으면 잘 믿고, 기분이 언짢으면 토라지고…. 나 살자고 믿는 예수를 이렇게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늘에서는 군병이 되어 달라고 모처럼 전무후무한 은혜를 베풀었는데, 결국 쓸 만한 그 군대감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맨 처음에 이 단상에 서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외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은 노여움을 풀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앞선 역사에서 주의 피를 헛되이 짓밟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는 여러분께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각자 회개하여 자범죄를 사함 받는 경우와, 이 손길이 닿아 한평생 쌓이고 쌓인 모든 죄(원죄, 유전죄, 자범죄)가 소멸되는 경우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죄가 소멸된다는 것은 죄(자범죄)가 뭔지도 모르는, 회개도 물론 할 수 없는 어린애를 안찰했을 때 처음에는 몹시 아파서 보채다가, 두 번 세 번 안찰을 받을수록 아픔이 가셔지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애가 물려받은 원죄와 유전죄가 차츰 소멸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동시에 성령을 받았을 때, 각자 그 강도(强度)에 차이는 있었지만, 남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나 바울은 남에게 부어 줄 정도로 성령을 넘치게 받았으며,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불과 같은 한 증거의 성령의 역사로 간간이 명맥(命脈)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서와 같은 세 증거(불, 이슬, 생수)의 성령은 이긴자를 통하여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하늘의 군대로 추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주께서 이긴자를 내세워 하늘 군대의 수를 채우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긴자는 주의 피 권세로 여러분을 주 앞에 다듬어 세워 그 수를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남에게 성령을 부어 주었으나, 이런 사명은 맡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나를 통해 내리는 이 은혜줄을 든든히 잡고 따르라고 누차 말씀드리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이 줄기를 놓치면 첫째,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둘째, 군병의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견디고 또 이기기를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