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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0.26본문
Part 01. 말씀의 향연
Chapter 09. 요한과 물세례
믿음은 마치 세계 챔피언이 된 권투 선수와 같습니다. 그가 세계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많은 적수를 꺾어 물리친 것처럼, 참된 믿음을 소유하려면 여러 단계의 시험에 이겨야 합니다. 또 이 권투 선수가 자기 챔피언십을 오래 간수하려면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을 간직하려면 끈질긴 노고가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챔피언이 한 번 지면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를 상대방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믿음도 시험에 한 번 굴복하면 곧 마귀에게 믿음을 내주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간수하기가 어려우며, 놓치기는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투의 챔피언에게 도전해 오는 적수가 있는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도전해 오는 적수(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흔히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이 적수의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기편이 되어 있으므로 건드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마귀가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도전해 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열도와 시험은 정비례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를 믿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한탄하시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7:21)고 경고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고 가르쳤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믿는 자’란 주님 당시의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의 ‘믿는 자’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목숨을 걸고 거기 합당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인용한 주님의 모든 말씀에서 믿음이 결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간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세례 요한의 경우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성경에 미리 예언된 인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즉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의 길 예비자로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뭇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어 큰 은혜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례는 요한이 처음으로 주기 시작한 것으로, 그 방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이상 중에 지시를 받아 실시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모태에서부터 거룩하게 한 자로서, 일반 선지자와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그를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마11:9)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주었으나,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를 통하여 성령의 세례를 주게 되자, 물세례는 자연히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눅3:16)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곧 성령 세례의 그림자였습니다.
주님 당시나 사도 시대의 급선무는 주님의 정체를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네와 같은 보통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것이 가장 어렵고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하긴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意識構造)로 볼 때, 시골 목수 예수를 진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고방식(思考方式)에 변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인’ 또는 ‘부인’하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의 인정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큰 모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행1:5)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을 받으면 더 이상 물세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세례를 계속 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기 전에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8:36)라고 한 말이 이것을 단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세례는 하나의 과도기적인 은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으로 역사하는 시대에 이런 물세례를 준다는 것은 하나의 난센스(무의미)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