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Part 04 - Chapt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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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5.09
[3권] Part 04 - Chapt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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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4. 진리의 샘    

Chapter 22. 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즉 내가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육적으로만 판단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잘 산다고도 하고, 못 산다고도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못 살아?”하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말 가운데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서 뭘 해!” 하는 푸념도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리 있는 말이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특히 신앙에 있어서 사리(事理)를 올바로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짙은 어둠 속을 헤쳐 왔으며, 또 헤쳐 나가고 있습니까? 무지와 오해, 고집 등은 모두가 이 어둠의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둠을 하나하나 불 밝혀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은혜를 입으면 영, 육이 아울러 복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은 아무에게나 금세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정성과 여건이 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뜨겁게 공경하고 그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귀한 것을 손에 넣으려면 여간 힘들지 않은데, 하늘의 선물을 받기가 그렇게 누워서 떡 먹기일 수 있겠습니까?

 

이 하늘의 은총은 둘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은총과 영적인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육적으로도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긴 마귀를 잘 받들어도 이런 혜택이 돌아옵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의 편에 선 자가 아니면 매매를 못하게 한다.”(13:17)고 했습니다. 마귀도 자기를 잘 섬기는 자에게 물질적인 혜택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을 상고할 것도 없이, 용한 점쟁이가 잘 사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거나 점집 문턱을 자주 드나드는 것도 다 그들 나름의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까닭 속에는 이런 물질적인 혜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받는 혜택이란 고작해야 쥐꼬리만 한 물질적인 것에 그치며, 그 나중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귀를 섬겨도 잘 사는 길이 열리는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찢어지게 못산대서야 되겠습니까? 그는 육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어디 잘못된 점이 있지 않나 형제를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지 않았는가, 온전한 십일조를 했는가, 주의 종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는가 곰곰이 돌이켜보고 그 잘못된 점을 발견하면 곧 시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육적인 혜택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이며, 주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준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치는 것 자체는 주의 2차적인 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우리에게 주시는 1차적인 은총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즉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신 피의 은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은총에 비하면 다른 육적인 모든 은총은 극히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63)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죽은 다음에야 어찌 되든 우선 살아서 좀 편히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육적인 은총만 바라고 또 그것으로 족하게 여긴다면 그는 믿음의 제일 얕은 단계에서 서성이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의 종교가 아니라, ‘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더라도 육적인 것은 별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본의 아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양자를 분간해서 처신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과 그 제자들의 사이를 상기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적 등은 제자들에게도 납득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들은 주님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면 한 자리 하려고 잔뜩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지간(師弟之間)에 오가는 대화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하시는 그 나라의 이야기를 이 세상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19:21) 이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구구할 수 있지만, 주께서 육적으로만 잘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잘 살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역설도 나올 법합니다. 하긴 하나님의 뜻은 하도 깊어서, 은총만 해도 어디까지가 그 크신 손길을 베푸시는 것인지 우리가 잘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가난도 하나의 은총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컨대 가난이 동기가 되어 주님을 찾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물질이 풍성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또는 멀리하기 쉬운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부자까지도 도매금으로 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본위로 살며 자기의 소유를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언제나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부자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잘 섬기느냐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께 드리는 연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요컨대 얼마나 정성껏 드리느냐가 문제입니다. 깨끗지 못한 것은 주께서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한 것이 섞여 있으면 주의 역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은혜라고 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보았다거나 화끈한 불을 받았다거나, 하는 등등의 감각적인 것을 은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 밖에 더욱 소중한 은혜가 따로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혀서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하나님의 섭리 안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생명의 큰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을 가고 못 가는 것은 여러분이 하기 나름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려면 우리의 속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변화(중생)입니다. 이것은 물론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보기로 안찰을 들 수 있습니다.

 

안찰이란 성령의 조화로, 이를테면 일종의 영적인 세탁을 가리킵니다. 혼자서 몇 해를 새벽 예배에 참석하면서 애써 매달려도 물리칠 수 없던 악의 세력도 이긴자의 손이 한 번 닿으면 말끔히 씻겨 나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이긴자를 통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보고,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소중한 속사람이 언제나 그대로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 오히려 더 고약해졌다면 이런 맹랑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 인류는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이 절망을 소망 가운데 인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서고, 또 남들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구경꾼의 태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설마 아직도 이것이 참으로 내가 가야 할 진리의 길이냐, 아니냐 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 길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미지근한 상태에서 남의 꽁무니만 좇으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우선 주께서 섭섭히 생각하실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직도 여러분 중에 의심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충분히 알고 깨달을 만큼 가르쳐 주셨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실로 여러분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1:1)입니다. 그래도 모르겠다는 데야 난들 어떻게 합니까? 그런 분은 예수 믿지 말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