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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1.09본문
Part 02. 진리 안에서
Chapter 12. 시험에 떨어지지 말라 (1)
1) 시험의 종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고 두렵기까지 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까닭을 알고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마귀에게 빼앗긴 세상을 되찾고, 죽을 목숨을 죽지 않을 목숨으로 바꾸려는 싸움이 곧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차지한 세상에 살면서 딴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단지 그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땅 에서 호적을 떼어 하늘에 옮기려고 합니다. 즉 마귀의 편에서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바람이 일게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바람이 곧 ‘시험’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도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 혹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말 인즉 합의이혼 운운하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게 되려면 잠 못 이루는 여러 밤과 많은 언쟁과 나아가서는 주먹다짐도 불사하는 파란곡절을 겪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손에서 놓여나 주님을 신랑으로 맞아들이는 영적인 혼인이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온갖 시험을 참고 견디면서 싸워나가는 것은 물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시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믿음의 척도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을 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난 외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거나,
바벨론 방백(方伯)들이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에 대해 물었을 때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시험하신(대하32:31) 경우가 그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 게 하신 것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 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심이라.”(신8:2)고 했으며, 다윗도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돌아보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다.”(시17:3)고 말하여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세울 때 용의주도한 배려를 하신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인간이 약한데다가 마귀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못 미더워하며,(욥4:18) 따라서 신중을 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이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연단과 시험을 거쳐서 하나님의 눈 에 들어야 비로소 부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시험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주님에 대한 시험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마귀는 주께서 하늘의 도를 전하러 나서기 직전에 광야에서 시험 했습니다. 주님은 이 시험을 다 물리쳤지만, 이때 주님을 대하는 마 귀의 태도는 거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마4:5)
이것을 보더라도 마 귀가 얼마나 강하게 도전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이니 망정이지, 우리 같으면 지상에서 총궐기하여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영체이고, 우리는 육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침실에도 무상출입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줄 알지도 못합니다. 요새 신문에 인공위성이 화성(火星)에 착륙했다고 지구 전체가 온통 축제 기분에 휩싸여 있는데, 마귀는 화성쯤은 자기 집 드나들듯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화성에 한 번 닿으려면 무려 10억 불의 비용이 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떻게 마귀를 당해 내겠습니까?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손에는 능히 마귀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가 쥐어져 있습니다. 그 무기는 다름 아닌 주님의 보혈입니다. 천하만국을 차지한 마귀도 이 보혈 앞에서는 쩔쩔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하는 의(義)의 군병에게 서열이 정해지는 것처럼 마귀의 우두머리인 용의 졸개들에게도 고하가 있습니다. 즉 위에서 말한 주님을 능히 시험할 만한 큰 권세를 부리는 마귀가 있는가 하면, 주님 앞에서 쩔쩔매다가 도망치는 마귀도 있습니다.(눅4:34)
이런 크고 작은 마귀가 수시로 하나님의 역사에 도전하기 때문에 만유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쉬 이루어지지 못하고 6천 년 동안이나 지연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다 되는 줄 알고 있으니, 참 답답합니다. 주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했습니까?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마26:39) 이 ‘할만 하시거든’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무엇 때문에 주께서 이렇게 구차스럽게 조건부로 기도하셨겠습니까? 하나님도 할 수가 없어 부득이 주님을 산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피 권세로 악(惡)의 세력을 무찌르고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곧 우리 신앙인의 하는 일이요,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무슨 위대한 인격자가 되어야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보혈에 의해 더러운 죄를 씻음 받아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는 인격을 필요로 하지만, 인격으로 그 나라에 가고 못 가는 것이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죄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대체 무슨 놈의 죄를 그렇게 많이졌다고 만날 죄, 죄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선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 죄에 대한 의식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 은혜를 받으면 죄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이 눈떠, 자기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죄는 생명, 곧 피(창9:4)에 의해 유전됩니다.(벧 전1:18) 가령 아버지의 죄가 열 가지고 어머니의 죄가 다섯 가지라 면, 그 사에서 생긴 자식은 열다섯 가지의 죄를 갖고 세상에 태어 나며, 이 자식은 더욱 많은 죄를 그 자식에게 물려주어 몇 세대가 지나면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엄청난 죄 덩어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음이라.”(시51:5)하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분별 못하는 어린이도 엄밀히 말하면 죄인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젖먹이 어린애에게 안찰을 했을 때 몹시 아파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손길을 통하여 주의 진액(성령)을 받을 때, 몹시 아픔을 느끼는 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악의 세력(죄)과 맞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즉 비단 자범죄뿐만 아니라, 원죄와 유전죄가 함께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의 은총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마귀에게 ‘요주의 인물(要注意人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의 적수(敵手)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상대방에게 성령이 같이하지 않고 하나에서 열까지 마귀의 편에서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귀는 잠자코 있습니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 시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사단을 내쫓지 않는다.”(막3:23)는 주님의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 자신이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으로써(약1:14) 시험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자를 받을 욕심에서 어떤 믿음의 형제에게 돈 10만원을 꾸어줬는데 상대방이 장사를 하다가 날려버려 돈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돈 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한 것으로 알기 쉬운데,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시지 않습니다.(약1:13)
인간은 연약하여 말과 행실에서 본의 아닌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이 경우에 그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응분의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책임을 딴 사람에게 돌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모독하는 것도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책임 있는 주체(主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임을 딴 사람에게 돌릴 뿐더러 하나님께서 자기를 시험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만저만한 망발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들어 쓰시려 는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당한다는 것은 배격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문을 외우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의 시험은 주로 우리 자신의 잘못에서 오는 시달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