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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1.09본문
Part 02. 진리 안에서
Chapter 12. 시험에 떨어지지 말라 (2)
2) 비극의 선지자 예레미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내세워 역사하시는 것은 마귀의 세력을 무찌르기 위해서이며, 이 경우에 그 선택에 여간 신중을 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적진에 파송하는 야전사령관 격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경우를 살펴볼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임금이 아무나 장수로 임명하여 싸움터로 보내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의 종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종의 사명이 클수록 오랜 수련 기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레미야를 점찍어 두셨던 것입니다.
야곱, 모세, 삼손, 세례 요한, 바울의 경우도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알고 있는 비밀이며, 예레미야를 낳은 부모나 예레미야 자신도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장본인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로 말하면 ‘비극의 선지자’로, 어려운 역경 속에서 하늘 의 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시늉만 하는 모든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종교의 핵심은 심령 속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 리요마는, 여호와는 마음을 살피며 폐부(肺腑)를 시험하여”(렘17:9) 행위대로 보응하므로, “묵은 땅을 갈아”(렘4:3)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러한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며, 자행자지(自行自止)할 뿐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욕거리가 되면”(렘20:8)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이 격동하게 마련입니다. 이때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따르던 백성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저희가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렘20:10) 여기서 ‘타락’이니 ‘유혹’이니 하는 말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독신 생활을 한 데서 빚어낸 허무맹랑한 억측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종과 그 백성들은 피차 등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두둔하며, 백성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사 백성들의 견해가 옳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민12:1 참조) 아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책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크신 경륜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조치입니다. 더구나 예레미 야는 백성들의 무지와 오해, 중상 등으로 곤경에 빠져, 바벨론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구해내려는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었겠습니까?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의 어미가 나를 낳던 날 복이 없었더라면….”(렘20:14) 이것은 예레미야의 탄식 섞인 독백(獨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괴롭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선 저들 자신을 위해 큰 불찰이라 하겠습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괴로움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리라.”(렘11:14)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기도하기를 금한 고사(故事)를 상기하게 됩니다.(신3:26) 하나님은 으레 당신의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이런 두려운 지시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 노여움은 백성들이나 종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도,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시66:18) 는 것을 알고, 여호와의 눈 밖에 날까 언제나 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럴진대, 여러분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어려운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예레미야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 앞에 절하는 등 큰 죄악을 저지른 결과, 저들이 당대에 당한 환난도 환난이지만, 대대로 저들은 “세상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져 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렘24:9)
어떤 사람은, ‘아니 우상 앞에 절 좀 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당해야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대적하는 행위이므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모세 율법 제1조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제1조를 범하고 어떻게 그 기도가 상달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선과 악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겠습니까? 자고로 선악의 개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요컨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것이 선이요, 하나님의 일에 거역하는 것이 악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과 악을 하나님 본위로 해석해야 올바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 기준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정해지며, 또 그래야 합니다. 즉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하여 그 영광을 드러냈느냐 하는데 따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 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윤리와 세상의 도덕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런 데있습니다. 이 양자는 법도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양자가 다 숭상하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독교 윤리에서 보면 예레미야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보다 큰 부덕이 없지만, 세상의 윤리는 이에 대하여 매우 관대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이러한 물음이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적 윤리관(倫理觀)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