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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1.25본문
Part 02. 진리 안에서
Chapter 13. 감람나무에 대하여 (4)
4) 예언의 실현
인류 역사에서 제일 큰 사건은 뭐니 뭐니 하여도 메시아의 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사망의 굴레라는 절망에서 헤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죽음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길이 이때부터 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길을 진지하게 찾아보려고 노력만 하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근거에 의해, 육은 죽어도 영은 죽지 않는다는 분명한 확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언약대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지 않으셨던들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는 여전히 마귀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허덕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주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인류는 어둠 가운데서 한 가닥 서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다고 해서, 하늘나라를 이룩하려는 여호와의 뜻이 마무리되었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 차있고, 성령을 받아 주님을 진심으로 믿는 자는 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다시 오셔서 하늘나라를 세우겠다는 언약은 지연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지, 하늘나라 자체를 “다 이루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하늘나라를 이루도록 땅에서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곧 이긴자 감람나무입니다.(계2:26, 3:21 참조)
이 감람나무에 대해 교계에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아 논의의 대상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설혹 성경 해설집 같은 데서 몇 마디 언급한 것을 봐도 이단으로 단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감람나무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 즉 그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를 갖고 있지 못했거나, 이런 인물에 대한 오해 또는 속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론보다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에 대한 이해와 인식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감람나무의 역사에 부름을 받아 그 은혜를 직접 받아보지 않고서는 감람나무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행히 여러분은 그 울타리 속에서 자라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언제 어디에 감람나무의 역사가 있었느냐, 또는 현재 있느냐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감람나무의 역사는 구세주의 출현 다음으로 큰 사건입니다. 성경을 상고해 보면 감람나무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주의 피 권세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대업을 마무리 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계11:1-13, 2:26, 3:21 참조)
그런데 이 감람나무는 스가랴서나 계시록에 둘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여기에 가감을 하거나 무슨 조건 같은 것을 붙여서 이러고저러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감람나무가 실제로 나타나 하나님의 역사를 하는 이른바 ‘감람나무 시대’가 되면, 두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큰 권능을 쥐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그 감람나무를 통하여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고,(호14:5) 주의 피가 담긴 생수가 두 군데서 솟아나 값없이 마실 수 있으며,(슥14:8, 계21:6) 새로운 말씀이 쏟아져 나오고,(계2:17) 철장으로 마귀의 세력을 꺾으며,(계2:27) 양떼들의 믿음이 백향목 뿌리처럼 깊게 박히게(호14:5)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이 땅에서 일어났으며, 또 일어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는데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여러분은 바보입니다. 여러분은 바보입니까? 아마 영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분이 누구 못지않게 밝은 것으로 자부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상 여러분은 거의가 신앙생활의 맹장들입니다. 은혜 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분들입니다. 이건 여러분이 남달리 잘났거나 똑똑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이 남달리 주님을 잘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역사는 불과 같은 성령으로 병이나 고치는 그런 부분적인 은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를 모신’ 성경적인 존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내리며, 여러분은 현재 그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온 세상의 주를 모신’ 두 증인, 곧 감람나무는 이 땅에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주의 보혈로 온전히 정결함을 입은 종으로, 계시록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하면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하리라.”(계11:3-5)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오늘날 이 땅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에 대하여는 이미 나온 계시록 강해에서 대충 설명했습니다마는, 여기 말한 1,260일은 계시록에 나오는 이와 유사한 다른 숫자, 즉 마흔 두 달이니, 3일 반이니, 한 때, 두 때, 반 때니 하는 말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달력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날짜가 아니라, 영적인 일정한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네 단어가 같은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입에서 불이 나서 원수를 소멸한다.”는 이 ‘불’도 우리가 알고 있는 등불이나 횃불과 같은 그런 불이 아니고, 죄를 소멸시키는 ‘성령의 불’을 가리키며, 현실적으로는 이긴자의 입김으로 나타납니다. 이긴자에게 입김으로 축복을 하게 하시는 것도 이런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이긴자가 사흘 반 동안 죽임을 당하는데, “그곳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며 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계11:8)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도 육신이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가 완전히 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상징적인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죽는 장소가 세 곳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죽음은 다시 살아나 성도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어 있습니다.(계11:11) 특히 계시록에는 영적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육적으로 표현한 데가 많은데, 이것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하긴 신학자들이 대를 이어 연구해도 알쏭달쏭한 것을 나 같이 불학무식한 젊은 사람이 알다니, 남들이 코웃음을 쳐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 거짓말을 하느냐?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내가 지금까지 한 말 가운데 성경과 어긋나는 데가 있나 한번 생각해 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로 여러분을 3년 동안 이끌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다면 벌써 들통이 났을 겁니다. 나는 성경을 올바로 가르쳐 드리는 것뿐입니다. 가끔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마는, 그건 그대로 되었으며, 또 될 것입니다.
나는 3년 전에 감람나무의 역사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대충 말씀드렸는데, 오늘날 그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주의 종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나는 슬픔의 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하고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나도 예레미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이 너무나 고되기 때문에 독신으로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양떼들이 순종치 않아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다하지 못했지만, 나는 여러분이 내 말에 순종하기 때문에 사명을 기어코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슬픔의 종이라는 말을 정정하여 ‘고난의 종’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무너진 데가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쉽게 목회하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과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만한 말씀과 권능을 들고 나서면 어디가나 환영받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가나안의 귀신들린 한 여인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마15:24)고 말씀하시고 일단 거절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주의 종들도 각각 맡은 사명이 따로 있습니다.
베드로는 뿌리는 종이고, 바울은 거두는 종이었습니다. 감람나무의 역사도 뿌리는 자가 있고,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계시록에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을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라.’”(계14:15)고 했는데, 이 ‘이한 낫’을 가진 자가 곧 거두는 종입니다.
이 곡식은 이른바 ‘알곡’을 가리키며, 우리의 이 역사는 요컨대 이 알곡을 만들어 천국 창고에 들여놓는 작업장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를 믿도록 인도하는 종이 아니라, 주를 믿는 자를 하늘의 군병으로 훈련시키는 종입니다. 인도하는데 그치면 별로 어려울 것 없지만, 다듬어 세우자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그날의 영광을 위해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