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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1.25본문
Part 02. 진리 안에서
Chapter 13. 감람나무에 대하여 (5)
5) 감람나무의 역사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당시에는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죄에 떨어진 후의 인간은 생각이나 성품이 모자라고 때가 묻어 하나님의 일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의 세계에 대해 자기 나름으로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람나무에 대해 신학자나 교역자들이 갖고 있는 견해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성경에서 이 감람나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여기에 대한 인식이 매우 희박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감람나무는 그들의 체험 밖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체험의 종교인 기독교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밑받침이 있을 때 비로소 실감 있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람나무와 같은 영적인 개념의 경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 감람나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선지자 스가랴의 입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감람나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스가랴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기 위해 이상을 보여 주시고, 스가랴가 잘 아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행적까지 곁들여 비유해 가면서 자상하게 설명하였습니다.(슥4:7-10 참조) 이것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감람나무에 대해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감람나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인간을 가리킵니다.(슥4:14)스가랴서에 보면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시고 선 자’, 다시 말해서 당시의 세상 인구가 10억이든, 50억이든 간에 그 대표로 주를 모시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그 감람나무 가지에서 금 기름이 흘러내린다.”(슥4:12)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 기름’은 주의 피,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이 말씀이 실제로 부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감람나무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하나님의 큰 종은 두 사람을 차례로 세우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큰 역사는 반드시 시작할 때와 끝마칠 때가 있으며, 아무리 큰 종이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기가 벅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입증하고 있으므로, 구태여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압니다.
감람나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역사에서 금 기름이 메마르면, 나중 역사에서 다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슥14:8) 이 경우에 앞선 역사만 알고 있는 사람은 기름이 아주 끊긴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하게 되지만, 나중 역사를 알게 되면 소망을 되찾게 마련입니다. 잃었던 은혜가 곧 다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역사는 결코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보(修補)하는 역사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중 역사가 끝을 잘 마무리 지을 때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던 앞선 역사도 자연히 불명예를 씻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감람나무의 역사에서 선두에 서는 사람은 아무래도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성경에 명시된 ‘두 감람나무’라는 말씀과 부합되지 않은 것으로 알기 쉬우며, 감람나무의 역사 전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감람나무는 동시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나타나면 백성들은 두 파로 갈라져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씨를 뿌릴 때의 종과 열매를 거둘 때의 종을 따로 일정한 기간을 두고 적당한 시기에 세우게 됩니다. 이 적당한 시기란 앞선 역사가 마무리될 무렵이며, 이것을 성경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두워갈 때”(슥14: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감람나무가 혼자서 일하는 동안은 ‘두 감람나무’라고 명시한 성경과 부합되지 않아, 말씀을 억지로 풀이하며 가감을 하는 폐단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워갈 때 빛이 따로 생기면’ 그때 말씀이 올바로 풀려나가 앞뒤의 모든 경위가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나중에 나타난 감춰진 빛이 어둠을 환히 밝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앞선 역사를 이어받아 수보하는 완성의 종에게 자상하게 가르쳐 깊은 말씀이 터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단12:5-참조)
주인이 목수를 시켜 집을 짓는데, 마땅치가 않아 그를 물러가게 하고 다른 목수로 바꾸었을 경우에, 새로 고용한 목수에게, “먼저 사람은 그렇게 했는데, 당신은 이렇게 해 주시오.” 하고 앞뒤의 자상한 내막을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물러가는 목수를 불러 놓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면 그보다 더 부질없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단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말씀이 터져 나가는 것은 같은 하나님의 역사지만 먼저 하는 일과 나중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는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자를 가리킵니다. 감람나무는 ‘온 세상의 주를 모시고 선 자’(슥4:14)이고 ‘큰 산도 평지가 되게’(슥4:7) 하며, ‘금 같은 기름’, 곧 성령을 부어주는 자이며,(슥4:12) 이긴자는 ‘주의 보좌에 함께 앉는 자’이고,(계3:21) ‘만국을 쳐서 질그릇 깨뜨리듯’하고,(계2:27) ‘감춰진 만나’, 곧 주의 보혈을 먹여주는 자 입니다.(계2:17) 즉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뜻은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감람나무의 역사가 서서히 세대교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앞선 역사는 나중 역사에 흡수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베드로가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갈2:9)를 청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깨끗이 정돈될 때가 올 것입니다.
한번 감람나무의 금 기름을 받아 마셔본 사람은 다른 데 가서는 은혜의 시장기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의 가지는 역시 감람나무에게 와야 온전히 접붙임을 받아 제대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매장되어도 감람나무의 역사는 매장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