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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본문
Part 03. 새벽별이 빛날 때
Chapter 06. 기도에 대하여
1) 기도는 어떻게 상달되는가?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기도인이 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도는 신앙생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좀처럼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기도가 상달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 즉시 상달이 되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香煙)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8:3-4) 이와 같이 천사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인 천사는 지상의 어디나 쫙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있는 곳에 마귀가 있고, 마귀가 있는 곳에 천사가 있는 것입니다.(슥3:1 참조) 그리하여 이들 천사들은 각자 일정한 임무를 맡아 분주히 움직입니다. 가령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를 골라서 상신합니다.
이 경우에 확신을 갖지 않고 기도를 하거나,(막11:24) 자기의 정욕을 위해 기도하거나,(약4:3) 남을 미워하고 기도하거나,(막11:25) 또는 이유가 적절치 않게 기도하거나, 그밖에 합당치 못한 기도는 천사가 제쳐놓습니다. 이런 기도는 상신해 봐야 응답을 받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을 번거롭게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기도만 천사의 손을 거쳐 상달되며, 이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아들여 역시 천사의 손을 거쳐 응답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천사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향내 나는 예배만 하나님께 올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이 제단에서 100명의 예배가 상달되었다면 하나님은 여기 해당되는 은총을 내려 보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주의 아내로 인정을 받으려면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즉 성전을 주관하는 천사의 인정을 받아,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의 눈에 든 다음, 인 치는 천사의 손을 거쳐 인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의 기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기억을 받고 못 받는 것은 천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경우에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는 성전을 주관하는 천사의 보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고, 인 치는 천사는 제단을 주관하는 천사의 요청이 없으면 역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예배 때나 겨우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성전을 주관하는 천사나 알아줄 뿐이며, 주님의 기억을 받으려면 더욱 영이 맑아져야 합니다.
2) 낙심치 말고 기도하라
우리가 믿음을 잘 간수하려할 때 가로막는 세력의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기 마련이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됩니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시험을 당하여 낙심하기도 하고, 본의 아닌 오해로 좌절을 느끼기도 하며, 뜻하지 않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걱정하였으며, 재판관에게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번번이 귀찮게 구는 어떤 과부의 예를 들어, 낙심치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18:7)고 반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가장 소중한 말씀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세상에 매이기 쉽고, 자기 나름으로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에 변덕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적신호(赤信號)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꾸준한 기도와 말씀으로 이를 과감히 물리쳐, 어떤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미처 모르고 무작정 주의 종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던 전도사 시절에는 마치 쪽배를 타고 거센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처럼 믿음에 기복이 많이 있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나면 두렵고, 파도가 잔잔하면 마음이 평온하고,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믿음이 해이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신앙 자세였던 것입니다.
그 후 단에서 내려와 세상에 나와 살 때에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치 않았습니다. 새벽 예배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십일조의 생활도 어김없이 하였으나,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난관에 부닥치게 될 때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되는 게 없는가?” “내가 길을 잘못 잡았는가?” “차라리 우상을 섬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리하여 나는 일부러 전에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에 젖어, 신앙인이 아니라 사회인으로 생활 전선에서 당당히 경쟁하려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열성으로 세상일을 하면 돈도 벌고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나는 꿈에 이상한 징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에서 내로라 으스대는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 처참하게 당하는 광경이었습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눈물로 통회 자복하고, 내 목숨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마워, 더욱 열심히 매달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후 주님의 지시에 따라 청량리에서 처음으로 이 역사를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선 역사나 이 역사나 같은 감람나무의 역사인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공의롭지 못한가 하는 불평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앞선 역사는 하루아침에 폭발적으로 일어나 3년 만에 전국을 휩쓸었는데, 그 뒤를 이어받은 나중 역사는 하루에 몇 사람 전도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입에 담을 수 없는 인신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라.” 하고 자포자기하여 혼자서 밤이 깊도록 논두렁길을 거닐면서 마냥 실의(失意)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이상 중에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 당하였는데, 그 정도를 이기지 못해 딴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 급히 무릎을 꿇고 다시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은혜 투정을 하는데, 지금은 전과 다르다. 전에는 값없이 주었으나, 받은 자들이 그것을 다 짓밟아 버렸다. 이제는 땅에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확증이 보일 때 주기로 하겠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역사지만 치리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두 기계를 다 하늘에서 사용하지만 운전 방식은 같지 않으며, 또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옥토에 뿌린 씨앗이 한 번 마귀의 밥이 되면 하나님에게 여간 불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수법을 달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뜻을 받들어 어떤 비바람이 닥쳐와도 요동치 않는 신앙을 키워야 합니다. 낙심은 금물입니다. 지금은 금같이 연단하여 주 앞에 세우는 역사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련을 견디고 이겨야 합니다.
조그마한 시험에 낙심하고 떨어져 허랑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신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3) 기도에 응답을 받으려면?
신앙은 하루 이틀에 몸에 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많은 시련과 연단을 거쳐 반석 위에 서게 됩니다. 마귀가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귀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한 번 주를 불러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령이 약동할 때 비로소 그 신앙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하고 순수하지 못하면 주님과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져 무관하게 됩니다.
신앙은 이론으로도 알아야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 속에 주의 성령의 감동, 즉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이적이나 기사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희한한 이적, 기사는 한때 사람들을 분발케 할 뿐,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믿음이 식기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선 역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은혜와 앎과 꾸준한 노력으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며, 이때 주님과 굳게 연결됩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면 뭐합니까? 그 속에 주의 성령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이것은 주께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심령이 어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실제로는 이 말씀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기도에 좀처럼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심지어 산에 가서 몇 주일씩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울부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눈물겨운 노력에 비해 그 성과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여!” 하고 한 마디만 해도 금세 은혜가 연결되어 응답을 받습니다. 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에는 곧 응답을 주시고, 누구의 기도에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감감무소식일까요?
우리가 주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요컨대 성령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령 받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동참한 여러분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신앙 자세부터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번번이 땅에 떨어져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면 이보다 더 애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사실상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즉 기도드리는 장본인의 마음이 정결하면 쉽고, 그렇지 못하면 어려운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정결한 곳이므로 정결치 못한 기도는 상달될 수 없습니다.
천사가 그 기도를 하나님께 바칠 수 없고, 설사 바쳐도 받지 않습니다.(계5:8-9, 8:3 참조) 아니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더욱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좀처럼 응답을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선 각자 정결한 그릇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회개가 앞서야 합니다. 즉 기도할 때 먼저 자기 양심에 거리끼는 모든 죄를 십자가 앞에 모조리 내놓고, 진심으로 뉘우침으로써 주의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아 심령이 맑아진 다음에 기도를 드려야 비로소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에는 자기 죄를 많이 의식할수록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롬5:20)는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우선 죄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믿음을 측정하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믿음이자랄수록 죄에 대해 신경이 예리해지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죄에 대해 둔감한 사람일수록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내가 전에 전도사를 그만두고 세상에 나가, 장사합네 하고 분주히 돌아다닐 때의 일입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 한 구석에서 현재 우리 성회에서 단을 지키는 김해성 성회장과 마주앉아 돈벌 궁리를 하다가, “지금 나한테 주의 은혜가 연결되어 있어.” 하고 넌지시 말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 단상에서 6년 동안 그렇게 목이 터져라하고 외쳐 왔으나,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외치면 외칠수록 입에서 박하와 같은 은혜가 연결되기 때문에 갈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가정에 가서 생수 축복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입김을 부는 순간 곧 은혜가 연결되어 그 맹물이 생수로 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령이 하는 일이며,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욕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렘11:14)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자의 기도는 받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곤경에 빠져 나에게 기도를 부탁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가 기도를 드릴 때 그 장본인이 주님께 합당하면 곧 성령의 신호로서 은혜가 연결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냉랭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헛된 기도를 하지 않기 위해 우선 자기 자신의 정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다주 앞에 내놓고 눈물 뿌려 회개하여 맑고 깨끗한 심령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기도드릴 마음의 준비가 갖춰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의심, 정욕, 미움, 시기, 혈기, 불평, 비방 등등으로 가득 차있으면 주를 골백번 찾아도 헛수고에 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지저분한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죄를 마음속에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처럼 딱한 일은 없지만,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18:3)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린이는 단순하고 순수합니다.
우리는 물론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나, 어린아이 같이 티 없고 맑은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입술만의 기도가 아니라, 뼈 속에서 우러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따라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