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3 - Chapter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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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6.27
[6권] Part 03 - Chapter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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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새벽별이 빛날 때 

Chapter 12. 자유 율법에 대하여

 

기독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교류는 줄곧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계셔서, 즉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해 이처럼 인간과 교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류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나 인간은 시대에 따라서 많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령 지구가 평평하여 그 가장자리에 이르면 천만 길 아래로 뚝 떨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정도의 사고방식에 맞춰서 교류하시며, 오늘날 지구가 둥글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달나라에 왔다 갔다 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역시 거기 어울리는 수준에서 교류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시대에도 지역적인 여건에 따라 적절히 대하십니다. 예컨대 나는 한국 사람으로 다른 나라 말은 잘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영어로 이래서 저래라 지시해 봐야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반드시 한국말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만일 미국 사람으로 영어밖에 모른다면 하나님께서는 물론 영어로 지시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시대와 환경과 습성 및 여건에 맞춰서 적절히 역사 하십니다.

 

5천 년 전의 인간의 지식과 사고방식은 오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그만큼 판이 한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같은 감람나무에 대해 스가랴와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는데, 전자와 후자 사이에는 시대적으로 약 600년의 거리가 있습니다.

 

즉 스가랴는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약 시대의 선지자이며, 사도 요한은 근 1,900년 전에 주께서 세우신 신약 시대의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람나무에 대해 스가랴서에 기록된 말씀과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지금으로부터 1,900년에서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과 여건을 잘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법에는 모세의 율법과 자유의 율법이 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모세를 통하여 반포하시고, 자유의 율법은 당신의 아들, 우리 주님을 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10:16, 31:33) 이 말씀은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주님이 바울을 내세워 할례를 폐지시킴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 이후로 수천 년 동안 당신의 백성들에게 지키게 한 율법을 폐지시키고 새로운 율법을 반포했을까요? 모세의 율법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율법은 지금부터 약 3,400년 전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선포한 것으로, 당시에는 적합하였으나 차츰 세월이 흘러 세상이 개화되어 사람들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변하게 되자 이 율법에 여러 가지 모순과 허점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일률적(一律的)이고 형식적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개개인의 정상을 참작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어기기만 하면 동기(動機)야 어쨌든 간에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츰 이 율법에 적지 않은 부작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신명기 1915절에 보면 사람을 정죄할 때 두세 증인이 있어야 했지만, 만일 이 증인의 입만 막으면 엄연히 죄를 지어도 죄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와서 권력자나 부유층은 증인을 적당히 매수하여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올바로 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율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자유의 율법으로 각자의 양심에 비추어 법도를 정한 것입니다. 죄의 내용은 당사자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율법은 적어도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얼버무려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일정한 규례가 없으며 각자의 처지와 여건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가령 심한 신경통으로 잘 걷지 못하는 노인은 몇 달 만에 간신히 한 번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은 그를 기특하게 여기지만, 건강한 사람이 날마다 교회에 나와 살다시피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귀히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죄도 신앙의 체계가 선 사람이 범했을 경우와 교회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는 사람이 저질렀을 경우는 그 경중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의 율법은 각자의 정상을 참작하지만, 모세의 율법은 그런 융통성이 없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은 결과에 치중하고 자유의 율법은 동기에 치중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어기면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그 피가 정결한 만큼 죄 사함을 받지만, 자유의 율법을 범하면 자동적으로 연결되던 은혜가 끊기며, 회개하여 다시 은혜 연결을 받아야 합니다.

 

즉 말씀에서 감동을 받았건 감각적으로 신비로운 은혜 체험을 했건 그 후에 죄를 지으면 성령이 떠나 가슴이 냉랭하고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므로 자유의 율법에서는 구태여 증인을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한 돌에 일곱 눈이 박힌 보혜사 성령이 살피시는 것입니다.(3:9, 4:10)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가 같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유의 율법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유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지키지 않으면 은혜는 끊깁니다. 그리하여 빨리 다시 은혜줄을 잡지 않으면 주님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은혜 연결을 받기도 하고 놓치기도 한 체험이 있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언제나 은혜 연결을 받아 하나님을 뜨겁게 섬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줄 알라.”(2:12)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율법을 지키려면 모세의 율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은 자유의 율법에 이르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자유의 율법에 이르지 못하며, 자유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왕의 반열에 속하는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