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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0.19본문
Part 04. 우리도 이기리
Chapter 20. 방언은 은혜인가?
나는 방언에 대하여 이미 여러분에게 성서적으로 자세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주께서 다시 이 방언에 대해 보여 주셨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방언의 근본 의의에 대해 거듭 설명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공경하며 말씀을 상고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만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나타나면 무조건 하나님의 큰 은혜인줄 알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믿음이 말씀으로 다듬어져 있지 못하고 은혜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독초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그것이 생명의 꼴인 줄 알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폐단을 경고하여, 영을 시험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요일4:1) 나는 어느 교회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논하는 것뿐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또다시 홍수가 났을 때에 대비하여 이를 피하기 위해 성과 대를 쌓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에 기대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저들로 하여금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려고 저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창11:8) 했습니다.
방언의 은사란 이렇게 흩어진 언어를 다시 알아듣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이 합당하면 뭉치게 하고, 합당치 못하면 흩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언을 제일 처음으로 한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그 길로 밖에 나가,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말이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었는데, 저마다 자기 언어로 그들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행2:6)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시일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베드로를 비롯하여 여러 사도들의 말을 권능으로 조종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성령의 조화였습니다.
매스컴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서울 사람이 부산쯤에 가도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많으며, 제주도에 가면 더욱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교통이 발달되지 못하고 미개한 당시에는 몇백 리 밖에 살아도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식한 어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방언을 하여 의사가 소통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입을 딱 벌리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은혜 받게 해 달라고 베드로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린다.”(슥8:23)는 말씀이 응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 방언의 권능으로 믿지 않은 사람들을 하루에 3천 명이나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행2:41) 베드로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하여 저마다 방언 받기를 원하고, 또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방언을 하게 되었으나, 주의 종인 베드로나 제자들처럼 온전한 방언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릇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방언은 제3자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초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 훨씬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반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즉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보다 훨씬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언을 통역하는 자까지 등장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방언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는커녕 정신이상자로 알고 손가락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방언에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을 내세워 방언을 폐지시켰습니다. 이때 바울은 방언을 조심스럽게 비판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언을 폐지한 것을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울보다 더 큰 종이 나타나지 않아 방언에 대한 바울의 말을 올바로 풀이하여 가르쳐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방언을 폐지시키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켰던들, 구태여 외국어에 능한 바울을 이방 사도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방언은 당초의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곁길을 가고 있습니다. 즉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방언을 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잘 알아듣는 자기나라 사람에게 방언을 한답시고 뭐라고 쓀라쓀라 떠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방언하는 장본인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듣는 사람은 더욱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난센스(무의미)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불필요한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방언을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줄 알았다가는 큰 오산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흉내를 곧잘 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는 문을 닫았는데 땅에서는 달라고 하니 중간에서 마귀가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니”(고후11:14)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도 무사태평이었습니다. 아니 저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기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엘리야만이 그것이 하나님께 큰 범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백성들에게 전했으나, 저들은 이런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방언이 은혜가 아니라는 것은 그 불필요하고 덕스럽지 못함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 받은 사람을 내가 안찰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는 영락없이 몹시 고통을 느끼고 까무러치기가 일쑤입니다. 그것으로 그가 어떤 신을 받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치 못한 것은 온전한 것 앞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