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4.10.19본문
Part 04. 우리도 이기리
Chapter 21.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인간은 각자 얼굴 모습이 다른 만큼이나 개성이 다르고 생각이 다릅니다. 따라서 남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탓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고, 또 같은 종교에서도 여러 파가 갈리는 것도 이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불교를 믿는 사람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또 같은 예수를 믿어도 어떤 사람은 장로교회에 나가고, 어떤 사람은 감리교회에, 또 어떤 사람은 에덴성회로 나가는데, 거기에는 각각 사연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자기 나름으로 보면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이러니저러니 비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쯤은 인정합니다. 하긴 예수를 우리네와 같은 자연인, 그러니까 정신적인 지도자 정도로 알고 따르는 종파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합니다마는,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神性)을 인정하는 데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기독교는 수도(修道)의 한수단에 불과하며, 구원을 운운할 여지조차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수한 예이고,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대체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간주하는 데 별로 이의가 없지만, 주님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이천 년 전 볼품없는 시골 청년 예수를 어떤 사람은 엘리야로 보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선생이라고 보았으며, 개중에는 예수를 마귀(바알세불)로 보는 사람까지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주님을 잘못 본 착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저마다 자기의 시점(視點)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엘리야로 본 사람은 주님에 대해 그 정도의 눈이 마련되어 있고, 마귀로 본 사람 역시 그런 눈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당사자는 누구나 자기가 똑바로 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예수를 명실 공히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는 이상 어떻게 평하건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사실 주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예수를 똑바로 알아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눈을 갖게 한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신이요,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늘날도 불신자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 시골의 젊은 목수가 지닌 신성을 알아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열성적인 제자들이 윗저고리를 벗어서 예수가 걸어가는 길에 펴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 왕이여!” 하고 야단법석을 떠니, 바리새인들은 보다 못해 주님에게, “선생님, 거 당신의 제자들은 제정신이 아니군요. 남 보기에 덕스럽지 못하니 저들을 좀 제지하시오.”(눅19:39)하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나온 ‘선생님’이라는 말에 유의해야겠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도저히 선생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를 신격화(神格化)하는 무리가 있으니 실로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를 신격화한 것이 올바른 평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서는 이들만이 당신의 사람이요, 그밖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군식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내가 어떤 관련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며, 관련이 없는 사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는 나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에게는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마귀입니다.(마4:1 이하 참조)
오늘날 이 땅에는 크신 하나님의 섭리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 가운데 복음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이러저러하고 여차저차해서 따를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들은 자기의 판단이 옳은 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때에도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 예비자로 와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세례를 줄 때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면 일단 자기 사명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제넘게 주님이 하시는 일에 신경을 쓰다가 자기 제자들의 말만 듣고 끝내는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관한 것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며, 자기가 나설 처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런 자기 분수를 알았던들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됩니다. 한 샘에서 어떻게 동시에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이것을 혼동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죽어도 저버리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고 간사한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다짐을 받을 만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적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