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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0.19본문
Part 05. 진리의 등대
Chapter 26.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숨을 쉬면서 살아가고 있으나, 막상 무엇때문에 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멍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물음에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좀 더 잘 살려고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위해서는 고생도 무릅쓰며 때에 따라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고 값있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요컨대 그 사람의 인생관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대답의 내용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가령 돈을 벌기 위해 산다는 사람, 사랑을 위해 산다는 사람, 명예를 위해 산다는 사람 등등,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이것은 모두가 요컨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생활임에 틀림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본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태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본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 태도입니다. 이 인본주의(휴머니즘)와 신본주의(헤브라이즘)는 세계 문화의 두 갈래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으나, 오늘에 와서는 전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좀 더 잘 살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켜 눈부신 물질문명을 만들어 냈는데, 오늘날 그 문명이 오히려 인류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본주의가 점점 기독교까지도 침식해 들어가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그릇된 신앙관(信仰觀)을 갖는 경향이 농후해 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고 해서 ‘나’를 아주 저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요컨대 하나님보다 ‘나’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엡2:8)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의 편이 되어 마귀와 싸워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인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인간은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마16: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도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을 선지자에게 지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책입니다. 인간이 머리로 생각해 내어 쓴 책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필요로 하시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은 하나님께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은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창6:6)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인간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를 구속해 주십사하고 부탁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의 말을 믿고 따르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 기뻐하시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섭섭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람을 내세울 적마다 인간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선 그 요구가 무엇인가를 알고, 다음에는 그 요구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으며, 40억이 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즉 그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 사람은 어느 시대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본주의의 생활보다 인본주의의 생활이 훨씬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하면 내가 싫어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해야 하니, 그것은 불편한 생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이처럼 천국은 좁은 길을 통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짝지어 호의호식하면서 편안히 가는 길이 아닙니다. 편안히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편안히 가려면 마귀가 잡고 있는 세상과 타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은 세상을 등진 사람,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지 못해 사는 사람에게 잘 내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하늘의 도를 전하신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교권을 쥐고 잘 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주님을 오히려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은 오지 않으며, 왔다가도 “아이고, 골치야!” 하고 외면하기 쉽습니다. 세상에 매인 사람들의 머리에는 복음이 잘 들어가 박히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기보다도 어려운”(마19:24) 법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천진스러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어설픈 지식이나 작은 능력을 내세우면 은혜가 가지 않습니다. 주께서 순진한 어린이를 좋아하신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것을 기뻐하십니다. 나도 세상과 영합하여 구수한 말로 교인을 모아 놓고 2부, 3부의 예배를 보게 하자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며, 또 주님의 지시 내용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인기나 끌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그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 한 마디를 어긴 죄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버림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