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Part 02 - Chapter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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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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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새벽종이 울리면

Chapter 13. 이사야의 고민

 

이사야는 지금부터 약 2,700년 전, 남왕국 유다의 선지자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이사야에게 유다(남왕국)와 이스라엘(북왕국)에 대해 들려주신 영음과 보여주신 계시로 되어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세운 것은 그가 남달리 인품이 고결하거나 재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당신의 종으로서 부릴 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사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선지자를 들어 쓰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에는 으레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인간(선지자)은 수동적으로 이에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어느 날 밤 이사야가 잠들어 있는데 뜻밖에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1:3)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잠결에 이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여 영문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계속 들려 왔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1:11-15)

 

이사야는 그제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 대해 크게 노하신 것을 알고 두려운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토록 노하실까? 무슨 일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제사까지도 받지 않으려고 하실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사야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의 의중을 살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만 저만 노하신 것이 아닌데, 이사야로서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니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려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상 중에 이사야가 처음 하나님을 뵈었을 때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한 가운데 여호와를 뵙게 되어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때 천사가 제단에서 빨갛게 피어난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고 말했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6:7) 이때부터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교류하면서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잣말처럼 개탄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

이사야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소식을 전하기를 좋아할 선지자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빤한 일이며, 크게 변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기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대담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로부터 뜻밖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아서라.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으면 어떡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회개하는 것조차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저들은 회개하고도 곧 다시 죄를 지을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죄악의 뿌리가 저들에게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가까스로 물었습니다.

 

여호와시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느 때까지 그처럼 노하시려하나이까?”

온 땅이 황폐하여 집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가슴이 철렁하고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을 모조리 쓸어버릴 심산이 아닌가?’ 이사야는 자기까지도 포함시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무수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 쓰러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습니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사야를 보시고 측은히 여겼던지 말씀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과히 겁낼 건 없다.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베어져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남을 것이다.” 그제야 이사야는 한시름 놓이기는 했으나, 한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을 생각하니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하여 크게 노하고 계시다는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에 하나님의 영음을 들은 이사야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의 제사도 받지 않고 기도도 듣지 않을뿐더러 쓸어버리려고 할 정도로 노하였을까요?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합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며,”(2:8)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 중의 죄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다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1:21) 저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에 흘러 음탕한 생활을 즐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1:21) 하나님은 저들의 부덕을 크게 개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정도만 인용해도 하나님께서 그토록 노하신 연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 죄를 그토록 미워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사 당신의 백성들이 큰 죄를 지었기로 제사를 받지 않는 것까지는 몰라도, 무더기로 쓸어버리려고 하시는 것은 너무 무자비한 처사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런 일은 이미 모세 때에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불평불만을 터뜨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는 등 주책을 부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가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흙에 묻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당신의 백성이 저지른 죄를 철저히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선민을 택하여 그 은총 아래 보호하면서 역사하시는 것은 심심해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와의 치열한 싸움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이 죄에 빠진다는 것은 저들이 당신의 편이 아니라 마귀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성경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3:8)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적대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토록 미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적이 없다면 얼마든지 관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과 겨루는 마당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가불 이들 적대 세력을 쓸어버리고 당신의 편에 선 자들만 남겨 놓으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합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1:25-26)

 

즉 하나님은 인간이 마귀와 짝하여 도저히 돌이킬 가망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이처럼 대청소를 감행하고, 그야말로 새 술은 새 부대에담아 당신의 전열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런 마귀와의 대결을 전제하고 보아야 하며, 그래야 성경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1:19-20)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치리하는 원칙입니다.

 

이사야는 크게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하겠는데,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백성들 앞에 나타나 소리소리 외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의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2:6)

그러나 저들은 거의 다 이사야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일소에 붙이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저가 뭔데 저 야단이야. 웃기는구나!”

,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짖고 있는데, 노하시다니 말도 안 돼.”

 

그러나 이사야는 계속하여 미친 듯이 외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이상 중에 예기치 않은 지시가 왔습니다. 그것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앞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날 놀라운 소식으로 신비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크게 놀랐으나 이 아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막연히 이 아들은 자기보다 몇 배 위대한 선지자가 되려니, 하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지시대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그 후 700년이 지나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밖에도 이사야서에는 주님에 대한 예언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율법사와 제사장, 서기관들이 수백 번 읽고도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 대한 내용을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종들의 입을 통하여 예고했지만, 마귀가 알세라, 성경에 여기 저기 숨겨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층에 속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제사장, 율법사, 서기관들도 다만 메시아가 언젠가는 자기들 앞에 나타나려니, 하고 막연히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오직 그 주인공인 주님만이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말씀을 종합하여 당신에 관한 내용을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3년 동안 역사하실 때 그 말씀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막상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는 주님도 육을 입고 계신지라 한동안 약해지기도 했지만, 정작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의식하고 그 아픔을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7:46)(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주님의 마지막 신음소리였습니다. 주님은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저절로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는 하소연이 흘러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을 놓고 논란이 많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주님을 버리며, 따라서 주님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육을 입은 주님의 인간적인 절규였으며, 주님에 대한 예언을 담은 시편22편을 읊은 것입니다.(22:1)

 

우리는 주께서 당하신 이 십자가의 고통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낙심하거나 불평하는 것은 주의 고통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것은 주의 십자가의 고난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핍니다. 그러니 주의 뒤를 따르려는 우리에게 못 참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10:38) 여러분은 주의 고난에 동참하여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만일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면 아직 이 역사에 손님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