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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2.14본문
Part 03. 믿음의 푯대를 굳게 잡고
Chapter 21. 성령의 기능 (1)
1) 죄, 피, 은혜
말씀의 존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흘린 피는 인간의 죄를 소멸시키는 거룩한 제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피는 이를테면 ‘영의 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죄악 때문에 영이 맑지 못하고 피가 흐려 있습니다.
영과 피는 이처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회복하여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그 백성이 될 인간의 피를 깨끗이 하여 영을 맑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짐승의 피로 인간이 저지른 죄를 사하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주의 피로 인간의 죄를 소멸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피는 죄를 사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9:22)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주의 피는 짐승의 피와 달라, 깨끗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는 물론, 원죄와 유전죄까지도 사함을 받게 된 것이 다릅니다. 만일 주님이 피를 흘려주시지 않았던들 인간은 영원히 원죄와 유전죄에서 놓여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늘나라의 백성은 지상에서 배출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우리가 생수를 받는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흐리고 더러워진 우리의 피를 맑고 깨끗한 주의 피로 정결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슥13:1) 주의 보혈은 이와 같이 영적인 신비로운 권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경우에 그 성령의 조화로 피가 맑아지고 영이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생명이 형성되며, 이것을 성경은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의 피로 새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理性)을 초월한 생명의 원리로, 우리 체내에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실제로 성령을 받아 거듭난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아 새 생명으로 탈바꿈을 하면 생각과 보는 눈, 듣는 귀 그리고 언동이 자연히 달라지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피의 원리는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권능이나 부활의 의미는 오직 우리에게 다른 보혜사 성령이 임했을 때에만 산 신앙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뜨거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의 피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칼슘 혈관주사를 맞았을 때 화끈함을 느끼는 것과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의 피에 주의 피가 섞이는 격입니다. 이때 우리가 자극을 받는 것은 그 두 가지 피의 요소가 달라서 서로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나한테서 안찰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몹시 아프지만, 여러 번 안찰을 받으면 차츰 그 아픔이 가셔서 나중에는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만큼 피가 맑아진 연고입니다.
안찰이란 요컨대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일종의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안찰을 받아 피가 정결케 된 후에는 스스로 더욱 큰 은혜의 다림줄을 잡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주의 피가 우리의 피와 연결되어 나도 아니고 주도 아닌 새로운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영의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 이와 같이 성령은 기독교의 생명이며, 따라서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를 헛 믿는 것이 됩니다.
이 말에는 반론이 제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주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했으니, 주를 부르고 교회문을 드나들면 일단 성령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주라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해도 잡혀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주님 당시의 일이며,
따라서 오늘날 입으로는 주님을 부르면서 죄 짓기를 밥 먹듯 하는 자들까지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잘 밑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죄를 지으면 그만큼 피가 흐려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더러운 피가 주의 깨끗한 피를 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를 쏟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은혜를 받았다가는 쏟고, 쏟았다가는 다시 받는 것을 되풀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졌다 이겼다,
이겼다 졌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오래 간수하여 꾸준히 이겨 나가야 하며, 그렇게 하려면 성령을 받을 만한 마음의 바탕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성령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즉 성령이 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장벽)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리케이드가 곧 죄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멀어질수록 성령은 강하게 임하며, 따라서 그 느낌도 커집니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을 비롯하여 여러 문도들이 불과 같은 성령을 받았을 때 이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대담무쌍하게 되어, 자기 목숨을 내걸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긴자를 통하여 내리는 성령은 주로 물(이슬, 생수) 같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실제로 받아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불과 같은 성령은 주님을 증거하다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강하게 임하여 드디어 순교하게 되면 천사가 그 영혼을 지성소에 안내합니다. 그러나 이슬 같은 성령을 받으면 순교하지 않고서도 지성소에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슬 같은 성령은 세마포를 ‘입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슬 같은 은혜만 받으면 누구나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도 쏟아버리면 허사가 됩니다. 아니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더욱 큰 문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큰 은혜를 베풀수록 받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만큼 간수하기에 힘을 기울여 ‘나’를 버리고 주님 위주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죄를 지으면 성령은 떠나 버립니다. 이것이 곧 자유의 율법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움, 짜증, 원망, 시기, 중상, 혈기, 낙심, 불안, 탐욕 등의 모든 원치 않는 죄악의 뿌리가 모두 빠져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성령은 능히 할 수 있습니다.